[역사학,인문학,역사교육학] 이완용 1858~1926
- 최초 등록일
- 2003.05.09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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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李完用, 1858∼1926
● 미국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으로
●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본문내용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매국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이 되어 반민족행위를 계속하면서 잔명(殘命)을 보존하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