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류만이 힘을 합쳐서 이를 쫓았다 =>몽골의 1차침입 충주노군, 잡류별초 항전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번 문서에서는 ...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 최우 적신 이의민은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폐하께서는 ~중흥하소서 =>최충헌 [ ]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지광수와 노군의 항전 - 몽골과의 화의 성립 - 장기 항전을 위한 최우의 강화도 천도 2차 침입 - 몽골의 살리타 재침입 -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가 살리타 사살 / 몽골군 퇴각 ... 강동의 역 - 여몽연합군의 거란군 격퇴 - 이를 계기로 몽골이 고려에게 막대한 공물을 요구 -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1차 침입 - 몽골의 살리타 침입 - 귀주성에서 박서의 항전 / 충주에서
그러나 막상 적이 쳐들어오자 양반 별초는 도망쳤고 노군 잡류 별초들은 끝까지 성을 지켰다. ... 몽골군의 1차 침입 때 충주성에서는 양반 별초와 노군 잡류 별초를 조직하여 성을 지키려 하였다. ... 오히려 양반 별초들은 나중에 돌아와서 관청의 은그릇이 없어졌다고 트집을 잡으며 노군 잡류들에게 혐의를 씌워 죽이려 하였다.
헌데 이때 충주성에서 적군을 격퇴시킨 사람들이 노군과 잡류별초였다는 데서 우리의 관심은 한층 고조된다. 당시 충주에서는 적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별초군을 조직 하였다. ... 1차(1231)의 몽고 침입군은 충주성에서도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 그리하여 부사인 간종주는 양반별초를 지휘하고, 판사는 노군? 잡류별초를 지휘하였는데, 정작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지휘관과 양반별초는 모두 도망하여 버리고 노군?
한데 이때 충주성에서 적군을 격퇴시킨 사람들이 노군과 잡류별초였다는 데서 우리의 관심은 한층 고조된다. 당시 충주에서는 적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별초군을 조직하였따. ... 1차(1231)의 몽고 침입군은 충주성에서도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 노군들은 없어진 은기는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노군의 수령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일부의 별동부대가 광주·충주·청주 등 여러성을 공격하였는데 오직 충주만은 충주성을 지키는 노군잡류별초에 의해 끝까지 항진하여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 본론 -충주의 지리적 특성 -충주의 역사(시대별변천사) -충주댐 (+충주호) -충주의 문화유산 (중원고구려비/중앙탑) -기업도시로서의 충주 -충주의 특산물(사과/담배) 3. ... 뿐만 아니라 충주∼청주간의 4차선 도로를 비롯하여 원주가도와 문경가도의 고속화도로가 완공되고 충북선이 복선화되어 충주는 산업도시에서 교통중심도시로 도시기능이 증대되고 있으며 충주댐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충주성의 양반과 노군ㆍ잡류의 관계일 것이다. 이 자료는 몽고의 침략에 맞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였다. ... 노군들은 몽고군이 약탈해갔다고 말했으나, 호장(戶長) 광립과 대여섯 사람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노군의 우두머리를 죽이기로 하였다. ... 강화천도와 같은 해에 충주에서는 관노들이 봉기하였는데, 이 사건은 당시 고려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중에도 지배계급의 민중에 대한 수탈이 멈추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2)천민의 항전 1차침입 때 충주까지 내려온 몽고군을 격퇴한 것은 충주의 노군과 잡류별초였다. ... 이때 군공이 있는 관노와 천민에게는 벼슬이 주어졌다. 6차침입(1254~1259)때에는 충주부근의 다인철소 주민들이 각지를 노략질하며 남하해 온 몽고군을 대패시켰다. ... 몽고군이 이르자 이미 지휘관인 각급 수령과 양반별초등 지배계급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1253년의 5차침입 때에도 다시 충주의 천민은 농민과 함께 몽고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
. ◎ 천민의 항전 1차침입 때 충주까지 내려온 몽고군을 격퇴한 것은 충주의 노군과 잡류별초였다. ... 이때 군공이 있는 관노와 천민에게는 벼슬이 주어졌다. 6차 침입(1254~1259)때에는 충주부근의 다인철소 주민들이 각지를 노략질하며 남하해 온 몽고군을 대패시켰다. ... 몽고군이 이르자 이미 지휘관인 각급 수령과 양반별초 등 지배계급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1253년의 5차침입 때에도 다시 충주의 천민은 농민과 함께 몽고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
그 특징은 충주민의 투철한 항쟁정신과 충주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곧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항쟁의 주체 세력이 백정과 노군 잡류, 천민 등이 중심세력이었다는 점이다. ... 군이었으며, 1931년 충청북도는 10군 2읍 104면이 되었고 충주는 이때 충주읍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었고 충주군은 중원군으로 ...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5년 1월1일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즉 단양이 적산현(赤山縣), 단양의 영춘면이 을아단현(乙阿旦縣), 제천이 내토현(奈吐縣), 제천의 청풍면이 사열이현(沙熱伊縣), 충주가 국원성(國原城), 진천이 금물노군(今勿奴郡), ... 충주시 북서쪽에 있는 장미산성(薔薇山城)을 고구려의 국원성의 치소로 비정하고 있는 점과 충주시의 중원 고구려비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삼국사기} 지리지 에는 남한강 유역인 충주·제천·단양군을 비롯하여 진천·음성·괴산군이 모두 고구려 영역에 속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