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컨텐츠세미나 《북경》 북경을 대표하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인에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사회주의를 수립하여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 2층 누각에서 모택동이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곳일뿐더러 반면 천안문 광장은 민주화 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흠차 대신 임칙서는 외국인 상관(상점)을 봉쇄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1839년 6월 3일 임칙서는 23일에 걸쳐 영국 무역 감독관이 거두어 보낸 외국 상인들의 아편 20,000상자를 ... 궁지에 몰린 청나라 조정에서는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협상을 기선에게 맡겼지만, 홍콩 할양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1839년 3월 이에 청나라의 황제 도광제는 ‘아편엄금론’을 주창한 임칙서를 광둥 성으로 보내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영국인 신부가 백기를 들고 임칙서를 찾아왔다. 신부는 임칙서에게 아편반대는 찬성하나 식수와 식량의 단절은 비인도적인 처사라며 비난한다. ... 이에 임칙서는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흠차대인이 되어 광주로 부임하게 된다. ...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며 상소를 올린 호광총독 임칙서를 불러들인 황제는 그에게 아편을 근절시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임칙서에 철수 명령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 그리고 임칙서를 광동에서 아편을 근절토록 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이렇게 파견된 임칙서는 광동에 무역 정지와 상관 봉쇄를 명했고, 외국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불살랐다. ... 광동으로 파견된 관리 임칙서에 의해 아편이 출입이 금지되면서 대량으로 중국으로 아편을 팔려고 한 영국의 계획이 무산되어 아편전쟁이 발발했다는 점, 아편은 양귀비의 즙으로 만들어 진다는
이 숫자는 임칙서가 조사한 숫자와 거의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임칙서는 내심 만족하였다. ... 그런데 1,037상자라니 이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임칙서는 격노하였다. ... 임칙서는 사전 조사를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고 아편이 2만 상자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임칙서의 친구이며 동지였던 위원(魏源)의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일찍이 일본에 수입되었다. ... 이 원정함대의 위용에 경악한 청조는 광주에서 교섭할 것을 약속하고, 임칙서를 파면시켜 타협파인 기선(琦善)에게 교섭을 담당시켰다. ... 임칙서는 마카오에서 발행되고 있던 외국신문과 서적을 번역하고 연구하여 서구(西歐)사정의 파악에 힘썼고 이를 통하여 서구문명의 군사기술면에서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더욱 궁금해진다. 1838년 중국황제는 중국민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아편을 금지시키라는 임무를 임칙서에게 내린다. ... 광동성에서 끝장을 보려던 임칙서의 생각과는 반대로 영국은 황제가 있는 북경을 향해 북상하였으며 북상하는 중에 여러곳을 공격하였다. ... 이에 중국황제는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생각해 임칙서를 파직하고 다른대신을 임명한다. 중국황제는 영국의 화력을 대항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여기서 임칙서와 기선이 대립한다. 임칙서는 중국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지키자는 무장론이고, 기선은 손실을 감안하고서라도 전쟁을 막자는 현실론이다. ... 밀려오는 영국의 군대 앞에, 황재는 결국 임칙서를 버리고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한다. 간혹 임칙서는 애국자고 기선은 매국노라는 서술이 있었다. ... 아편근절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황제도 임칙서의 걱정처럼 자신의 신념을 꺾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당시의 간신이었던 기선대인을 흠차대인으로 임명하고 임칙서를 파직시켰다.
영국은 임칙서 개인을 비난했는데, 이는 중국의 강경책이 임칙서의 독자적인 결정과 행동에 기인한 것이라는 견해였다. ... 임칙서는 가해자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임칙서는 중국에 있는 외국인에 대한 사법권은 중국이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그들은 임칙서만 처벌하면 영국인들을 무마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청조는 임칙서를 파면하고 기선을 광동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1840년 11월 말 교섭이 재개되었다.
협상 조건이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임칙서가 유배에 처해졌으며, 영국에서는 더 기세를 몰아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제 2차 아편전쟁에서도 중국이 패배하였다. ... 아편무역으로 초래된 은의 유출로 인해 1839년 중국은 임칙서를 파견하여 아편 반입과 중국인의 흡연을 막도록 하였으며, 파이프를 몰수하고 아편을 압류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임칙서가 불태운 아편은 대부분이 영국 상인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임칙서 조치로 인하여 중국이 궁지에 빠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 결과 중국정부는 임칙서를 밀수단속을 위한 특별판무관에 임명하여 밀수품인 대량의 아편을 불태워버렸고, 선장이 아편을 가지고 다니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않으면 어떠한 선박도 입항허가를
처음 ‘임칙서’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지만 ‘임칙서’의 스승이자, 황제의 스승인 아편 흡연자 ‘여자방’을 참형시키는 모습을 보고 황제의 단호한 뜻을 거절할 수 없어서 명을 받들게 된다 ... 또한 ‘하선지’가 아편과 관련된 관부들 간의 비리장부를 ‘임칙서’에게 건네는 장면과 그것을 건네받고 내란을 일으키려고 이런 장부를 나에게 주냐며 화를 내는 ‘임칙서’의 모습을 볼 때 ... 이 후 흠차대신 ‘임칙서’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영국 상인으로부터 압수한 2만여 상자의 아편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아편을 취급하는 상인들을 사형하기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