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일전쟁 후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박탈의 일환으로 각국 주재 한국공사를 소환하는데,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양국 황세의 밀사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 죄인으로 본 반면에 일본의 천황을 천주교의 삼부론(三父論)에 입각해‘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으로 인식해 근본적 비판을 가하지 못했다. 5)러일전쟁 이후부터 1911년 자결 전까지 이범진의
그러나 이범진은 단순 친러파가 아니라 누구보다 철저히 국가를 위하여 외교를 진행하였다=> 러시아도 이범진을 통해 이권 - 압록강변산림채벌권을 얻어보려함 하지만 이범진은 조선의 이익에 ... => 러시아도 이범진을 통해 이권 - 압록강변산림채벌권을 얻어보려함 하지만 이범진은 조선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여 거부함 가끔식 고종의 의사, 조선에 이익에 반하였지만, 그렇다고 ... 따라서 이범진 선생의 묘지로 추정되는 것에 한국 정부가 추모비를 설립하였다.
춘생문사건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李範晋)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嚴妃)을 통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 그리하여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도 이위종이 독립투쟁에 대한 불꽃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 이범진의 신념과 지원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 책에 소개되었던 것처럼, 그의 유년기는 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전 세계를 유랑하고 유학하며 당시 일반적인 조선인들이 받을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국제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이범진을 포함한 이위종, 그의 독립투쟁 동지들은 그러한 조건들이 충족될수록 오히려 역설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이며 ‘잃기 위한’ 이를 통해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의 불길로 뛰어들었다
주러공사 이범진이범진은 주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3개국 겸임공사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임했으며(1900년 7월), 1901년 3월부터 겸임공사직에서 해제되어 최초로 ... 이범진은 러일전쟁기에는 러시아 군대에 만주와 한국의 주요 전략 거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 러시아에 부임한 이범진의 최우선과제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강화하고 한국과 관련한 국제 문제에서 러시아의 역할과 비중을 높이는데 힘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