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여 듣겠다고 돌아보지 않네 我國天岸北(아국천안북) 내 나라는 하늘 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타방지각서)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남쪽은 따뜻해 ...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달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뜬구름만 쌀쌀하게 돌아가네 緘書參去便(함서참거편) 가는 편에 편지를 부치려 해도 風急不聽廻(풍급불청회) 바람이
이들의 주요한 이동경로는 北 으로는 北京?上海?天津?西安으로, 남으로는 廣州?深??海口?昆明 등이었다. ... [표 4] 농촌노동력의 鄕鎭企業으로의 이동 1993년 농촌노동력(만명) 鄕鎭企業노동력 비율(%) 농민 1인당 평균소득(元) 鄕鎭企業임금 비율(%) 전국 44,256 27.9 921.6 ... 이 속도는 개혁개방의 진행과 농촌공업화의 전개에 따라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노동력의 상당부분은 鄕鎭企業이 흡수해왔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실제 의도하는 것이 다르다. 2)비슷한 말: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 순망치한(脣亡齒寒) 1)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2)프랑스 말: 쎄라비 ‘ 그것이 인생이다’ 이응 입향순속(入鄕循俗) 1)그 고장에 들어가서는 그 고장의 풍습을 따른다. 2)로마에
이러한 소외는 민란의 형태로 분출 되었으며 이는 당시 호남은 역향(易鄕)이라는 악순환만을 야기 시켰다. ... 세웠음에도 논공행상에서 호남은 정여립의 잔당이라하여 철저하게 배제됨으로써 천향으로써 대우를 받게 되었다. 4) 일제통치정책과 호남 소외 일본의 식민지 수탈정책의 핵심은 남농북공(南農北工 ... 민란의 원인은 지배권에 의해 철저하게 매도되었고 호남을 역향(易鄕)으로 보는데 상승효과만을 가져왔다. 호남의 백산은 마한의 토성이었고 동진강은 성충의 항전장소였다.
北魏 均田法規에서는 寬鄕과 狹鄕을 ‘土廣民稀之處’와 ‘地狹之處’라고 불렀는데, 北齊시기에는 ‘寬鄕’이라고 하는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 《魏書》 卷 41에 景明 이래 北蕃은 해마다 旱害를 입어 高原의 들판은 營殖할 수 없고, 단지 水田만 조금 일굴 수 있습니다. 그런데 主將 ?
같이 정복한 국가의 귀족을 강제로 이동시켜 거주하게 하여 小京(소경)형성 ㆍ 행정중심지와 국경지대에 활발한 축성 ㆍ 중국 조방제에 의한 도시계획 ㆍ 주·군·현 밑에는 촌 이외에 향(鄕) ... 지점에 사방 7km의 지역을 구획하고 서둘러 1년만에 완성하였다. ③ 북에는 망산(邙山)이 솟아있고 중앙은 동에서 서쪽으로 낙수(洛水)1) 가 흐른다. 1)황하강 ④ 북에 북시(北市
동진정권하에서의 문벌귀족은 토착귀족과 피난귀족[북래귀족(北來貴族)]으로 나눠지고 같은 북래귀족 중에서도 먼저 내려온 자가 우대되었다. ... 한(漢)나라 때 추천과 시험을 병행하던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에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으로의 전환은 가(家)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향촌사회(鄕村社會)가 붕괴되고, 위?진?
이제 향도는 서서히 鄕徒로서 표현되면서 불교신앙보다는 지역민의 공동체적 유대강화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龍頭寺鐵幢記(962, 광종 13), 古彌縣西阮鐘銘(973, 광종 14), 臨江寺鐘銘(1019, 현종 10), 靑鳧大寺鐘銘(1032, 덕종 1), 仙岳寺鐘銘(1066, 문종 20), 川北觀世音寺鐘銘
―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했다” ⇒ 흘승골은 ‘승흘골升訖骨’이 거꾸로 된 것으로 ‘수릿골’이라는 의미다. ... 권 제1, 기이 제1,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다.” 권 제1, 기이 제1, “제13대 미추이질금味鄒尼叱今―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