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역사) 두 차례에 걸친 중국 국공합작의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 최초 등록일
- 2022.02.22
- 최종 저작일
-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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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2021학년도 1학기 기말시험(온라인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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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형
과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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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1. 중국, 두 차례의 국공합작
2. 일본, 도쿠가와 막부
3. 로마 공화정의 위기와 몰락
4. 중세 유럽의 서임권 투쟁
5. 자코뱅파의 독재와 제반 분파
6. 참고문헌
본문내용
I. 중국, 두 차례의 국공합작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화당이 끊임없이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도 두 차례는 서로 협력하고 연대를 구축한 적이 있었다. 이것을 ‘국공합작’이라고 부른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라는 의미이다.
1차 국공합작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국민당과 공산주의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전개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소련은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국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고, 국민당은 소련이 지원하는 경제적·군사적인 원조가 필요했다. 국민당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바뀌게 된다. 쑨원이 시도했던 사회 개혁이 수 차례 실패로 돌아가자 쑨원은 혁명에 군벌을 동원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산당을 이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공산당 역시 반제-반봉건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 전선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성사된 것이 1차 국공합작이었다. 다만, 합작의 형태는 국민당에 공산당의 당원들이 일부 개인의 자격으로 가입해서 국민당의 요직을 차지하고 활동하는 형태였다.
1차 국공합작은 3년 정도 순탄하게 유지되었는데, 국민당이 북벌에 성공하게 되면서 군벌을 제거할 수 있게 되자 국민당이 먼저 연대를 끊으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참고 자료
전남대학교, 1989, 이순영, 제2차 국공합작과 민족주의의 흐름
중앙선데이, 채인택, 2019.8.17. 로마 공화정 붕괴, 무리한 경제 개혁이 화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