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 등은 이미 한양에 신궁(경복궁)이 있으므로 따로 궁궐을 조영하는 것이 불필요함을 지적했다. 결국 이를 받아들인 왕은 ‘신이궁조성도감’을 ‘궁궐수보도감’으로 고치도록 했다. ... 그러나 이들 전각은 임금이 기거하는 어소였기 때문에 대개는 바로 복구되었다. 1) 태종의 이궁 창건과 조선전기의 보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활에 대한 모티브는 후에 진의의 아들인 작제건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작제건 역시 백발백중의 신궁이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고려의 건국이 정복 전쟁을 통한 정당한 일이었던 반면,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로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 이 본사 부분은 이성계라는 주동인물의 영웅행적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두 행이 한 장을 이루어 앞 행에서는 중국 창업주들의 이야기를, 뒷 행에서는 육조의 위업을 서로 대비하여 적고
태조 이성계가 도성을 건설할 당시 풍수지리상 서울의 안산인 관악산의 모양은 화기를 띄고 있다 하여 화산이라 지칭했으며 이 관악산의 화기가 도성안은 물론 경복궁까지 미쳐 화재를 일으킨다고 ... 영왕을 만나기 위해 방한 하였을 때 문루 양 옆 성곽을 헐어내고 길을 내었다고 하는데 이때를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은 점차 허물어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1920년대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그리고 얼마 후에는 성대한 환도 겸 신궁 입어식(入御式)을 가지게 되니 이에 한양은 5백여 년 도읍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1394년 7월 17일 고려왕조를 대신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한 다음 1394년 11월 26일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대표적인 예가 최영 장군으로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왜구의 침입을 막아 냈지만 결국 이성계에게 처참하게 처형되고 마는 비극적인 생애에 민중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 대표적인 곳으로 인왕산의 국사당과 무악재의 사신당이 있는데,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가 남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지금의 식물원 자리에 명치신궁을 세우면서, 신궁위에 있던
남산에 조선 황국화의 상징이었던 신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우리는 그것을 미쳐 모르고 총독부 건물에다 맞추어 광화문을 옮겨 앉힌 것이다. ... 경복궁은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일으키고 오늘의 서울에 처음으로 지은 만큼 역사는 가장 깊으나 임진왜란 때에 깡그리 불타 버려 273년 동안이나 버려져 온 빈터에 1868년에 대원군이
그러다가 고려 문종21년에 도읍을 옮겨야 하다는 기록에 따라 당시 楊洲였던 이곳이 南京으로 명칭이 승격되고 신궁이 조성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지배계급의 무능 부패와 권신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민중이 바라던 것은 새 세상과 새로운 시대에의 동경이었고, 이성계의 易姓開闢에 풍수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우선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그 이듬해에 창건한 조선의 정궁이 경복궁이다. ... 터의 길흉여부가 곧 왕조의 회복과 관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궁궐터의 선정 및 영건 문제는 항상 도읍설정문제와 함께 큰 관심사가 되어 왔던 것이다.이태조는 새로운 궁궐을 완성한 뒤 신궁에서
이태조는 새로운 궁궐을 완성한 뒤 군신과 더불어 신궁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 경복궁은 1398년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이어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그 이듬해에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