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심 미안했던 포이 측의 배려로 박태준은 하와이의 고급콘도에서 휴식을 보내게 되었다. ... 결국 견디다 못한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 이 휴식 기간 동안 박태준은 포철 건설에 관한 자금을 동원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박태준사장은 야와타제철 사장인 이나야마와 후지제철 사장 나가노를 만나 호의적인 답변과 지원을 약속 받았다. ... 하와이 구상 KISA의 거절에 종합제철사업이 백지화가 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박태준사장의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 당시 적자였던 대한중석을 1년만에 흑자로 돌려놓은 박태준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견에 따라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5.
박태준, 그는 누구인가………………………………………………… p.3,4 ? 세계속의 포스코………………………………………………………… p.4,5 ? ... 비록 자본, 기술, 경험도 없는 무의 상태였지만, 근대화를 위해, 철강 등 주요 기간산업을 중점 육성한다는 정부 정책에 맞추어,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39명은 1968년 4월 1일 ... 박태준, 그는 누구인가 그는 1927년 9월 29일 경남 양산에서 출생했으며, 와세다 대학에서 기계학을 전공하고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임관하였으며, 국방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에 손을
이는 박태준이라는 지역사회의 카리스마적 인물의 장기적인 군림에 따른 결과와 지역내 다선 국회의원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중아정치권에서 지역출신 권력자가 다수 배출되지 ... 또한 이진우 전의원 역시 포항제철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14대 선거전에 임했지만 그 역시 박태준회장의 정치적 실각과 궤를 같이 하면서 이른바 전국적 명성을 지닌 인물인 허화평의원에게 ... 전국회의원이었던 박경석씨는 당시 5공실세였던 현국회의원인 허화평의원의 추천에 의해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무난히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는 하였지만, 곧 허화평씨는 정치적 몰락과 더불어 포항제철 박태준회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