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잠시 개경을 수도로 삼을 것을 결정했으나 1년 후인 1404년 7월 10일에 삼부는 물론이고 종친 제군까지 모아서 다시 도읍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여 양경제로 최종합의에 이르렀다 ... 태조가 즉위 2년 봄에 신도 후보지로 계룡산을 간심(看審)하러 가는 도중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鄭曜)가 현비(顯妃)(신덕왕후 강씨)의 미녕(未寧), 평주? ... 정종 태종대 관료들이 개경을 선호하고 정종이 이를 충실히 따랐던 것에 비해, 태종은 입장의 변화가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