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1076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있었다. 이는 주교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과의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한 사건이다. ... 즉 카노사의 굴욕이 황제의 굴욕이라면 아비뇽유수는 교황의 굴욕이라 볼 수 있다. 교황(권)이 있고 없고에 의해 중세와 근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한다. ... . 1077년 1월 국왕 하인리히도 카노사에 와 3일동안 카노사 성문 앞의 눈밭에서 참회복을 입고 용서를 빌자, 교황은 국왕을 용서하고 그를 파문에서 풀어 다시 교회로 받아들인다. ... 교황은 하인리히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토스카나 변경백 마틸데(Markgrafin Mathilde von Tuszien)에게 보호를 구해 카노사(Canossa)로 가있는다
결혼 금지 주창 → 레오 9세는 교황의 추기경 임명 확립, 그레고리 7세는 주교의 임명권까지 주장] (4) 교황권과 왕권의 대립 ++++ [그래프 그리기 : 교황과 왕권 관계 - 카노사의 ... (1077) 교황 약세, 1077~아비뇽유수(1309)까지는 교황 강세, 아비뇽 유수 이후는 교황 약세] 서임권 투쟁 ☞ 교황 그레고리 7세 vs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 카노사의
그곳에서 하인리히는 3일을 맨발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동정을 구하여 결국 사면을 받았는데, 이 역사적 사건이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 더욱 더 절망적으로 변해갔고,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면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1077년 1월 하인리히는 교황의 사면을 받기 위해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로
교황이 반발하는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내리자, 황제는 카노사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을 찾아가 눈 속에서 3일 간을 빌어 겨우 용서를 받게 되었다. ... 이것이 바로 흔히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이다. [ 르적 열정으로 표현했다고 하면 르네상스 건축은 힘의 균형에 의한 정적미를 그 표현의 대상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