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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해진 무역의 역할과 특성
    1. 서론잠시 깊은 숨을 몰아쉬고 '타임머신'을 타고 9세기 중엽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인구가 겨우 백오십여 만을 헤아리는 한반도 신라국의 서남해안 최남단, 청해진에는 이른 새벽부터 수백수천의 뱃군들과 현지인들이 부산을 떨며 동양 세계 각국으로 떠나고 들어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서라벌의 감포, 일본 규슈의 하카다,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을 비롯 산동성의 적산포, 유산포 및 밀주, 강소성의 연운항, 회안 연수향, 양주, 소주, 그리고 절강성의 영파, 항주, 복건성의 천주 및 복주, 나아가 광동성의 광주 등으로부터 온 신라인, 일본인, 중국인, 심지어 중동 페르시아인들이 한창 어우러져 흥정과, 환영과 석별을 교환한다." 이 같은 남·북중국, 신라, 일본, 동남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고대 국제 해상무역행로와 족적은 단순히 헛된 상상 산물이 아니었다.2. 나·당·일 3국 항로의 요충지로서의 청해진범선 항해시대의 청해진 완도 해역은 나·당·일 3국 항로의 요충지였다. 완도 앞바다는 이 곳을 통과해야만 당나라와 일본에 갈 수 있는 항해의 길목이었다. 여기에서 미국 엇누스 대학의 클라크교수가 말한 바 장보고 대사의 '천재성'이 빛난다. 청해진 앞바다는 완도군에 속하는 2백여 개의 다도해 암초, 밀물과 썰물의 변화, 흑조대, 그리고 계절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해류, 해풍 등으로 변화가 무궁한 곳이다. 그럼에도 완도 앞바다가 앞서 말한 3개의 극동항로(노찰신수로, 황해 횡단항로, 남중국항로)의 중심부가 된 것은 그 이유가 아주 명백하다. 안전항해가 자연적 변수에 의해 좌우되었던 범선시대에는 육지나 섬에 가능한 한 접근하여 항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도항에서 출항한 대형 여객선이 제주도로 갈 때는 추자도 앞바다로 둘러 간다. 그 이유를 여객선원들에게 물으면 황천 항해시 대피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3. 아라비아·페르시아 등을 잇는 역할로서의 청해진당시 또 하나의 국제항로는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남부를 연결하는 이른바 남양항로였다. 이 항로에 의해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 그리고 강소성의 양주가 남방무역권의 접촉지역이 되었다. 금세기의 세계무역항로가 미국을 향한 태평양항로와 대서양항로라고 한다면 장보고 시대를 전후한 7-10세기 세계 주력 항로는 앞에 든 극동항로와 남양항로였다. 이 두 항로가 9세기에 이르러 장보고 상단에 의하여 서로 연결돼 비로소 남북무역망의 결정적인 통합고리를 형성하였다.이로써 완도 청해진은 단순히 극동항로의 중심부일 뿐만아니라, 남양항로와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나·당·일 문헌기록이 공동으로 인정하는(백제계) 신라인들의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장보고 상단의 조직력에 크게 기인한다.4. 청해진 해역의 일반적 사항황해는 5-6월에 완도 앞바다에 범선을 띄우면 저절로 황해도 해역으로 북상한다. 또 서북풍이 부는 계절에는 뱃머리를 중국 양자강쪽으로 향해 놓으면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 '자동 항해'한다. 반면 요즘도 8-10월이면 중국 강남지역으로부터 벼멸구떼가 한반도로 날아와 호남지역의 벼농사에 비상을 걸곤 한다. 해마다 이들은 해풍에 무임승차해서 대장정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바람뿐만 아니라 해류도 특이한 바다가 바로 황해와 한반도 남해안이다. 지금도 완도 앞바다를 벗어나면 바로 검은 띠의 해류를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흑조대이다. 이 흑조는 필리핀 동쪽 해역에서 형성되어 대만을 감싸고 돌며 북상한다. 이 해류는 폭이 30해리, 그 두께가 200-400미터, 중심유속도 3-5노트에 달한다.북상한 흑조가 동중국해로 들어서면 여러 갈래로 분리된다. 즉, 흑조는 중국대륙의 대륙붕과 연안수의 저항을 받아 황해에 진입하지 못하는 대신 시속 0.3노트로 진행하는 분류를 만든다. 분류 중 한 가닥은 양자강 입구에서 도도한 강물과 부딪쳐 소멸하고, 또 한 가닥은 황해의 중간에서 한반도 서남부쪽으로 쏠리면서 황해도 옹진반도 연안까지 북상하다가 산동반도 쪽으로 우회, 자취를 감춘다. 흑조의 또 다른 한 가닥은 한반도의 남해안을 거쳐 일본의 규슈와 혼슈의 남단에까지 진출한다. 이 해류의 존재는 지금도 규슈 앞 고도 열도 등지의 해변에 한국 남해안에서 흘러간 라면봉지, 비닐병 등 생활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그 곳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점 하나로도 확인된다.황해는 조류도 매우 복잡한 바다다. 한반도 주변해역에는 동해에 무조점이 하나인 반면, 황해에는 네 개의 무조점이 있다. 조류는 대마도 북쪽 동해 입구에 있는 무조점을 중심으로 동해 방향과 동지나해 방향으로 각각 12시간 흘렀다가 되돌아온다. 이렇게 바다는 지구의 자전과 달의 공전 등의 영향을 받아 오묘한 운동을 하고 있다. 남해에서는 조류가 동·서로, 황해에서는 서북·동남으로 흐른다. 이 조류는 해안에 가까워지면 들물과 썰물로 나타난다. 조류의 속도는 1.5-2.5노트지만, 연안수로에 이르면 5-6노트, 해남군 울돌목 등지의 해역에선 10노트를 웃돌기도 한다.완도해역은 특히 조류가 복잡한 곳이다. '한국수로국'에서 펴낸 완도항 일대의 조류도에 따르면 장보고 유적지 장도에서 완도항에 이르는 유향은 부근 해역과도 정반대다. 대마 난류에 휩싸이고 있는데다 완도군에 속한 202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얽힌 물목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바로 이런 해풍·해류·조류·다도해 등의 자연조건을 1백% 살려 완도에다 청해진을 설치, 동양 3국의 바다를 호령하면서 황해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장보고의 천재성은 바로 이 대목에서 번득인다.5. 종합상사적 성격의 청해진동양 3국의 항로를 장악한 청해진 종합상사의 취급품목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장보고 시절 신라의 수출 대종상품은 견직물·마포·금·은·인삼·약재·마피·모피류·공예품이고, 당의주요 수출품은 주단·약재·공예품·도자기·서적 등이었다. 여기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가져온 각종 향료와 악기·상아·보석류·카펫·유리제품 등이 추가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산인 자단 ·심향·비취모·대모·공작미 등이 있다. 특히 장보고 상단이 일본에 싣고간 '박래품'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본에서는 박래품에 대한 값을 비단·금·소뿔 등으로 결제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부등가 교환으로 인한 무역 역조현상이 뚜렷했던 듯하다. 일본 조정은 귀족사회의 사치풍조에 대해 수차 제동을 걸었으나 청해진 상단이 제공한 부증품(일종의 사례금)에 의해 치부를 한 다자이후 관헌들이 적극적 단속을 기피,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신라 흥덕왕도 서방세계의 사치품·전래품 등에 대해서는 한 때 수입금지 조치를 단행한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권33, 잡지색복조 흥덕왕 9년 [834]).6. 청해진 성립의 특징 및 권한6-1. 독자적 무역거래청해진과 재당 신라소의 설립은 해당 정부의 승인 아래 취해진 조치이지만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독자적이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경영상의 의사결정은 신라왕권 및 당조로부터 다분히 독자적으로 행하였고, 무역행위 등이 대부분 나·당·일 정부의 묵인 내지 비호 아래 전개되었다는 점(예, 공무역을 대신한 사무역을 경영)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해당 정부의 공무를 대행하거나 대신하는 경우는 역시 적지아니 목격된다. 또한 장보고 대사의 성품과 처신은 아주 인도주의적·민족적이지만 그 지향은 언제나 국제적이었고 그 활동범위는 세계를 무대로 하였다. 오늘날의 다국적 기업인의 원형이었다. 따뜻한 인간애와 정의감, 그리고 동포 사랑과 국제화 정신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백제, 신라계 동포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한편, 당나라가 당시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고는 해도 무령군 중소장직에 이어 대사라는 직명을 부여했을 만큼 중국에도 큰 공을 세운 듯하고, 영향력도 막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한편, 신라 본국으로부터 대번에 군사 1만 명을 거느리도록 허락받은 사실이라든지 감의 군사, 진해장군을 제수받고 식읍 2천호를 하사받은 배경, 그리고 두 나라에서 공히 행정상 자치권을 누렸다는 사실은 오늘날로 말하면 장보고 대사가 두 나라 국적을 초월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치외법권을 부여받고 활동하였음을 뜻한다.6-2 정경일체적 무역행위또 하나 장보고 지휘하의 청해진 그리고 재당 신라인들은 대부분 상공업과 해운·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나·당·일의 경제이익에 공히 기여함으로써 실제 공무역과 그를 대신한 사무역 행위를 전적으로 주관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 다국적 종합상사나 국경을 초월한 기업도 감히 행하기 어려운 거래 형태이다. 정경일체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거래 행태는 당시 나·당 또는 나·일의 정치경제 관계가 불편했을 때, 또는 조공무역이 종종 형평성을 결여하여 어느 한 쪽의 불평의 대상이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이럴 경우 관련국 서로에게 편리한 반관반민의 무역형식, 즉 장보고 상단에 의한 견당매물사와 대당매물사 방식이 성행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으로 껄끄럽고 재정수지마저 불균등할 경우 정부간 또는 국가간 공식거래보다는 실제 수요와 공급 그리고 거래가격을 반영하는 민간무역이 서로에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예, 수교 이전의 한·중 거래 및 현재의 남북한 교역). 따라서 장보고 때 이미 근대 무역양식에 가까운 민간 주도의 거래 형태가 이미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나·당·일에 국제적인 해양경영을 펼쳐 나갈 당시의 나·당의 중앙통제력은 잦은 정변으로 대단히 약화되어 공무역보다는 사무역이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경제| 2000.10.30| 7페이지| 1,000원| 조회(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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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대중문화의 발전 평가C아쉬워요
    대중문화론의 역사적 전개봉건적 질서의 붕괴와 연이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발전으로의 변화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내포하는 정치ㆍ경제적 질서 변화와 더불어 사회 전반에 걸친 대부분의 매카니즘의 변화를 수반했다. 우리가 이 글에서 언급하려 하는 대중문화론의 발전 혹은 전개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때의 변화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할 수 있다.형식적 측면에서나마 계급적 고립성을 지양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이전의 전자본주의적 사회는 귀족과 농노로 이루어진 이분적인 경직적 사회계층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귀족의 문화는 그 아래의 계층과는 공유될 수 없었고, 심지어 귀족이 아닌 사회구성원들의 문화는 대단히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회로의 전환(과학 기술의 발달과 연이은 산업혁명을 포함하는 의미로써)은 부가적으로 중간계층의 성장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성장한 중간계층은 이전까지 귀족에게 유일하게 부과되었던 문화의 창조ㆍ전달ㆍ수용ㆍ재창조의 역할을 흡수한 엄연한 문화과정의 일부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이러한 문화과정에 있어서의 중간계층의 참여는 문화의 지향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즉 귀족의 욕구와 귀족의 성향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문화의 창조자들은 수용자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중간계층의 욕구와 성향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촉진한 것은 문화의 과정 또한 당시 새롭게 부각되던 자본주의적 질서의 원리를 배워나감으로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일면의 순기능과 일면의 역기능을 동시에 포함하게 된다. 즉 문화 수용자의 범위가 확대되고 사회적 문화 재생산의 메커니즘이 활성화 된다는 순기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일면 문화의 질이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역기능 또한 감수 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러한 순기능과 역기능의 점철적 갈등은 반대로 사회에 있어서의 대중매체의 지위를 현대적ㆍ지배적 위치로 정립하는것에 관여하게 되었고 문화의 대중지향성은 고도로 밀집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 나갔다.대중문화의 발전과 그 대중문화의 고도의 대중지향성은 전통적 지식인층을 통해서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대중문화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고급문화의 쇠퇴를 가져왔다 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러한 공격과 비판은 그들 나름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문화에 있어서의 지위가 공격받음에 대한 이기적 투쟁이었을 수도 있고, 문화자체의 저질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일수도 있다.
    사회과학| 2000.09.17| 2페이지| 1,000원| 조회(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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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세대의 제약과 특권
    젊은 세대) 젊은 세대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광의성은 시간적ㆍ공간적 이유로 매우 넓고 크다 하겠다. 이 글에서 말하는 젊은 세대는 197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출생하였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과 발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학이라는 교육환경을 거치고 있는 세대를 의미한다.의 제약과 특권사 회 학 과9425-036장 운 영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독특한 감수성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와 다르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차별성을 띄고 있다는 사실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는 다른 독특한 제약과 특권을 가지게되는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되는데 그러한 독특한 제약과 차별성은 출생효과, 세대효과, 연령효과에 의해 혹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이 리포터에서는 한국사회에서 젊은 세대에 주어진 제약과 젊은 세대의 독특한 특권을 알아보는 것을 주(主)로하고 부수적으로 세대갈등의 융화에 대해 조금의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젊은 세대들은 그들이 말하는 기성세대들과는 다른 사회ㆍ경제ㆍ문화적 경험을 한 세대들이다. 이러한 세대들이 그들과는 다른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되며, 움직이는 사회에 접촉함으로서 야기되는 세대 갈등은 너무나 자명한 인과관계라 하겠다. 그러나 기성-젊은 세대간의 갈등은 각자의 단위가 가지는 힘의 차이로 인하여 기성세대의 승리-더욱더 공격적인 말로 표현하지면 기성세대에 의한 젊은 세대의 복종 강요-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젊은 세대가 가지는 제약이라는 것은 그러한 힘의 싸움에 있어서 기성세대의 전리품이며 젊은 세대의 피해액이라 볼 수 있다.제약의 구체적인 형태를 살펴본다.첫째, 젊은 세대는 경제적 능력의 미성숙으로 인한 제약을 받는다.교육을 마치지 못한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경제적 생산능력이 없거나 혹은 경제적 생산에의 욕구가 매우 낮다. 경제적 능력의 미성숙-혹은 不在-는 금전 사용에의 자율성에 커다란 제약을 가져오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행위에서 소비가 필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과 젊은 세대의 독특한 가치추구를 위한 소비활동이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상정하면 경제적 능력의 미성숙이 젊은 세대에게 주는 제약적 효과는 매우 크고 광범위하다 하겠다.둘째,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낮음으로서 발생하는 제약이다.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하여 가족ㆍ직장ㆍ지역 등의 사회에서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낮다. 이러한 영향력의 낮음은 일견 사회가 원하는 지위와 역할로부터 오는 부담이 적다-이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와 자신이 원하는 욕구의 충족을 위한 대(對) 사회적 조작력이 낮다는 의미도 된다.셋째, 기성사회 및 기성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