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를 읽고어린 시절 세계명작 전집 속의 한 권이었던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린 시절에는 책의 초반부가 간통 죄를 저지른 여자의 얘기로 시작되어 좋지 못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읽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세계명작이라는 책들 자체와 너무나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지금 다시 책을 들추어보니 어린 시절 한 번 읽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17세기 중엽, 청교도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준엄한 청교도의 잣대 아래 평판과 명예를 중요시하던 당시의 시대적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벌을 부여받은 여자 - 헤스터 프린. 늙은 의사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었는데, 남편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 사이 그녀는 펄이라는 사생아를 낳았고 간통 죄로 인해 죄없는 아이와 함께 감옥에 갇히고,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겪고, 그러고도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A’자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하는 형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끝내 간통한 상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온갖 수모를 꿋꿋이 혼자서 견뎌냈다.그러나 이 소설이 진짜 재미있는 까닭은 그녀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그 댓가를 충분히 받았을 뿐 아니라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영혼은 오히려 구제받았고 평안을 찾았으며 간통으로 생긴 그녀의 딸 펄은 그녀의 보살핌 속에 사랑스럽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무시와 불친절과 무례함들도 그녀의 끝없는 베풂과 봉사와 자기희생 앞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희미해져갔다.반면 불륜을 저지른 상대방인 딤즈데일 목사는 겉으로는 전혀 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날로 더 그 명성을 높혀가는 훌륭한 목사인 까닭에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 내면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날로 피폐해지고 육신마저 무너지고 있었다.이 소설은 서로 마주하기 힘든 위치에 있는 이 두 사람 사이를 제 3의 인물인 로저 칠링워스가 등장하여 연결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전개해나간다. 사실 그는 헤스터 프린이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그녀의 전남편이었다. 젊고 예쁘고 활달한 그녀에 비해 지나치게 늙고 연구만 좋아하는, 그래서 젊은 부인인 그녀를 무심하게 내버려 두었던 그는, 그녀를 홀로 내버려둔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를 한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그를 배신하고 간통으로 아이까지 낳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복수심에 불탄 그는 그녀가 광장에서 뜨거운 태양아래 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형벌을 받는 그 날, 그녀가 사는 마을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인디언들에게서 배운 약초 다루는 법 등을 내세워 의사 행세를 하게 되는데 마침 딤즈데일 목사의 건강이 나쁜 것을 이유로 목사집에서 기거하면서 그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된다.처음에 딤즈데일 목사는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 기인한 노인에 대해 그저 의사이고 자신을 돌보아주는 친구라고 생각할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나날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죄의식과 괴로움이 심해지면서 순간순간 로저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곤 했다.그러나 로저 칠링워스는 우연한 기회에 젊은 딤즈데일 목사가 불륜의 상대임을 눈치채고는 의도적으로 목사의 집에 기거하며 주치의 노릇을 하고, 불륜의 증거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끊임없이 목사 주변을 서성였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목사의 죄의식을 부추기는 얘기로 스스로 털어놓겠끔 유도도 하여 보았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채찍질 자국이었다. 아픈 목사를 돌보면서 발견하게 된 채찍질 자국! 그것은 목사가 죄의식을 달래는 방법으로 선택한 자기 학대의 방법이었다. 목사의 몸에는 스스로 내리친 끔찍한 채찍으로 인해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한편, 마을과는 동떨어진 외딴 오두막에 살면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던 헤스터는 로저가 딤즈데일 목사를 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과 로저에 관한 모든 사실을 딤즈데일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둘은 함께 마을을 떠나 한 가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계획을 세운다.이 때부터 목사는 활기를 되찾게 되고 삶의 희망을 느끼게 되어 되살아난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로저 칠링워스는 자신의 계획이 잘못 되어가는 것을 깨닫고 둘의 마지막 탈출을 막기 위해 헤스터가 구해 놓은 배에 자신도 동승할 자리를 마련해 둔다. 그들의 행복을 위한 마지막 탈출 계획을 로저가 눈치채고 방해하려 하는 것을 알고는 글을 읽는 내내 들키지나 않을까 내 마음이 좌불안석이었다. 조금 우스운 얘기지만 사태를 모르고 있는 주인공들보다 더 불안하고 조마조마 하였다.목사는 함께 떠나자고 하였지만 이미 기력이 너무 쇠하여 마을을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허약해진 상태였다. 그리하여 삶에 대해 초연해진 그는 로저 칠링워스가 끝까지 쫓아가 괴롭혀 줄 심산으로 그들이 구한 배까지 매수하여 두었건만, 허망하게도 그 배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그러나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리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목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새로 부임한 지사의 취임식날, 마지막 설교와 함께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만인 앞에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설을 한 목사는 스스로 처형대에 올랐다. 그 곳은 7년전 헤스터와 아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바로 그 단상이었다. 그곳에서 헤스터와 펄을 가까이 부른 목사는 자신의 가슴을 헤쳐보이는데, 그의 가슴에는 'A'자가 있었다. 그것은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헤스터가 가슴에 달고 살면서 사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 'A'자와 같은 것이었다.사람들은 비록 목사가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살았고, 영혼을 일깨우는 설교를 하면서 죄를 뉘우치고 임종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목사를 비난하거나 비웃지 않고 오히려 그 마지막 연설에 감동하였다. 또한 그 이후로는 아무도 헤스터나 그의 딸 펄을 놀리거나 비웃지 않게 되었다.
황사현상에 대하여목 차1) 황사 현상이란2) 발생조건3) 배출량과 구성성분4) 10년간 국내 발생 현황5) 한-중-일 협력강화6) 피해 및 대책들어가면서겨울 내 움츠리고 있다가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에 포근한 햇살과 봄바람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어김없이 봄철에 황사현상으로 나들이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많은 나쁜 영향을 주는 황사.황사현상이란 무엇이며, 발생원인과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고, 황사발생에 대한 대책, 특히 우리나라, 일본, 중국 삼국의 협력방안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아울러 황사피해 대책법에 대해서도 알아 보도록 하자.해마다 3~5월이면 한반도에 날아오는 황사는 중국의 경우 기원전 1150년에 '우토우호(雨土于毫)’라는 먼지현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3000년 전에도 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인 서기 174년 신라 아달라왕 때 와 ?서기 379년 백제 근구수왕때 ‘우토(雨土)’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우토:흙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뜻). 그리고, 서기 644년 고구려에서 10월에 붉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고려 명종16년(1186년)에 "눈비가 속리산에 내려 녹아서 물이 되었는데 그 색이 핏빛과 같았다."고 했는데 황사황토물 때문에 붉게 보인 것이다.조선 명종 5년 3월(1550년)에 "한양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전라도 전주와 남원에는 비가 내린 뒤에 연기 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었으며, 쓸면 먼지가 되고 흔들면 날아 흩어졌다. 25일까지 쾌청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황사현상을 일으키는 먼지인 황토는 신생대 제4기인 180만년 전에 생겨났다고 하고, 지금 한반도에서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황토는 수십만년간 황사가 쌓여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참조: 현대에는 대기오염으로 인해서 황사가 중금속과 발암물질을 동반하지만, 옛날에 날아와 땅에 뭍여 있는 황토는 깨끗하다.]건축 공사장에서는 쌓아둔 모래가 흩어지지 않도록 물을 뿌리거나 그물망으로 덮어놓기도 한다. 바싹 마른 모래나 흙이 있는 곳에 강풍이 불게 되면 모래 먼지가 바람에 날리면서 흙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봄철에는 겨울 내내 얼어있던 건조한 토양이 녹으면서 잘 부서져 부유하기 쉬운 20㎛ 이하 크기의 모래 먼지가 많이 생긴다. 여름에는 강수도 있고 가을까지도 땅에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모래 먼지가 묶여 있지만, 겨울을 지나면서부터는 모래 먼지가 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또한 황사의 고향인 유라시아대륙의 중심부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건조하며, 강수량이 적고 증발이 잘 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 1년 동안 내리는 강수량은 보통 4백㎜ 이하이며, 강수량의 변화도 심한 편이다(우리 나라의 연 강수량은 약 1천1백-1천7백㎜). 말하자면 원래부터 이 지역은 물과 식물이 부족해 항상 바람에 혼이 나고 있으며,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로 고문당하는 메마른 지역이다. 이런 지역에서 모래바람은 늘 일어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멀리 떨어진 우리 나라에 영향을 줄 정도의 대규모 황사가 발생하는 시기는 주로 봄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 나라에서는 황사 현상이라고 기록되는 날수는 일년에 약 3-6일로 4월에 주로 관측되고 있다. 중국의 사료에도 황사 현상은 봄에 많이 발생했으며, 1년 중 약 25%의 황사가 4월에 발생했다. 일본의 경우는 1년에 평균 5일 관측되며, 주로 일본의 서쪽 규슈지방에서 자주 관측된다.1) 황사 현상이란황사현상은 사막지대나 황토지대에 저기압이 통과할 때 한랭전선 후면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나 지형에 의해 만들어진 난류에 의해 다량의 먼지가 상층으로 올라가 공중에 부유하거나 장거리 수송도중 지표에 서서히 낙하하는 현상을 말한다. 중국과 몽고의 사막지대인 타클라마칸, 바다인자단, 텐겔, 오르도스, 고비지역, 만주 등과 황하중류의 황토지대인 황토고원이 발원지이다. 이 가운데 타클라마칸 사막은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5천 ㎞이상) 영향이 적은 편이다. 반면 만주에서 발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지만 한반도에 가장 근접해 있어 황사 발원시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다.2) 발생조건발원지의 동쪽에 위치한 우리 나라 고도의 편서풍 기류가 우리 나라 지표면에 낙하하기 좋은 기압배치는 고기압이 위치하여 하강 기류가 발생할 때이다.3) 배출량과 구성성분발원지에서 배출되는 황사량을 100 %라 할 때 보통 30%는 발원지에서 재침적 되고 20 %는 주변 지역으로 수송된다. 나머지 50 %가 장거리를 날아 한국 일본 태평양 등에 오게 된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관측된 황사의 크기는 1~10 ㎛ 정도로 1 ㎛ 입자의 경우 수년 동안, 10 ㎛ 입자는 수 시간~수일 동안 공중에 부유할 수 있다. 주성분은 석영(규소)과 장석(알루미늄)이며 철과 알루미늄 구리 카드뮴 납 등도 다량 함유돼 있으며, 지난해 한국해양연구소 홍기훈 박사 팀은 플라토늄 등 다량의 방사능도 검출됐음을 확인했다.4) 10년간 국내 발생 현황지난 90~99년 10년간 우리 나라에서 관측된 황사 발생횟수를 분석해 보면 광주가 26회 (58일)로 가장 많았으며 부산이 20회(42일)로 가장 적었다. 총 발생일수는 서울이 70일로 가장 길었으며 강릉이 37일로 가장 짧은 것으로 조사돼 서울ㆍ경기지역과 서해안 지역이 긴 것으로 나타났다. 황사는 주로 3월 초순부터 5월 중순사이에 관측되었으나 서울에서는 지난 91년 11월30일~12월3일에 발생하기도 했으며 지난해에는 이례적으로 전국에 걸쳐 1월25일 조기 발생하기도 했다. 가장 자주 발생한 해는 93년으로 24회에 걸쳐 91일간 나타났으며, 94년에는 5회에 걸쳐 7일간으로 가장 짧았다. 부산의 경우 92년을 제외하고는 주로 3~5월께 1~4차례씩 관측됐으며, 지난 93년이 5차례(10일)로 가장 많이 발생했다.5) 한-중-일 협력강화최근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황사로 인한 대기오염이 심화됨에 따라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은 환경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한국의 제의로 서울에서 개최된 제 1차 3국 환경장관회의 이후 3국은 ‘환경 공동체의식’을 갖고 동북아지역의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공동협력 프로그램 추진에 합의한 상태이다. 3국이 공동 추진키로 한 9개 사업은 △ 황사 및 산성비 등 장거리이동 대기오염에 대한 공동조사ㆍ연구를 비롯해 △ 동북아 환경센터 발족 △ 중국 서부지역 생태환경 복원사업 공동참여 △ 황해연안 오염저감사업 공동 추진 등이다. 이밖에 △ 3국 공동 인터넷 홈페이지 작성 및 환경정보 공유프로그램 개발 △ 3국 공동의 환경교육ㆍ훈련 프로그램 실시 △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등 지구환경문제에 공동 대처키로 했다. 3국 환경장관회의의 가장 큰 소득은 무엇보다도 그 동안 황사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회피하고 있던 중국 측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낸 점이다. 한ㆍ중ㆍ일 3국은 이제 이들 9개 사업의 세부적인 실천계획 마련을 위해 올 6월 이전에 제 1차 3국 환경부 실무자급 회의, 내년 초 일본에서 제 3차 3국 환경장관회의를 갖기로 했다.
『땅콩박사』를 읽고한동안 책을 읽지 않던 나에게 친구가 좋은 책이 있다고 소개하여 우연찮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땅콩박사'라 불리우는 조지 워싱턴 카버의 생애를 다룬 전기문이다. 그러나 타 전기문과는 달리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가지 난관을 헤치고 마침내 성공하게 된다는 고도로 계산된 영화 시나리오처럼 카버 박사의 삶이 다양한 경험과 고난들의 연속이었고 그 하나하나를 이겨나가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깊은 반성의 시간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미국의 남북전쟁 후 피폐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흑인노예로 태어난 조지 워싱턴 카버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심지어 자신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청년 시절에는 길바닥이 집이었으며, 추위와 배고픔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 카버는 결코 배움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매 순간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게, 더 건전하게, 더 멋지게 만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결국 그는 가장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카버 박사가 ‘땅콩박사’로 불리는 것은 사람들이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던 땅콩을 연구하여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목화 재배만을 고집해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남부의 땅에 콩을 심어 땅의 기운을 회복시켰다. 또한 이 때에 생산된 땅콩을 활용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한 끝에 105가지나 되는 아주 맛좋은 음식물과 200가지가 넘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미국 남부 지역 농부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뜰 무렵에는 땅콩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이 300가지가 넘었으며, 땅콩을 원료로 제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수십 개나 세워졌다.그러나 그 혜택은 그의 흑인 동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그를 천대하고 멸시하며 괴롭히던 백인들에게까지 각종 지식을 나누어 주고 생활이 향상되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미국의 국채를 구입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부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 노예가 아닌 조국을 사랑하는 하나의 시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월급인상을 수 차례 거절하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언제라도 그의 월급을 나누어 주며 수많은 발명품에 대해서도 이익을 취하지 않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그런 인품의 사람이었다.총칼을 들고 싸우거나 사람들 앞에 나서서 흑인의 인권을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그 결과를 모든이들이 평등하게 고루 누리도록 함으로써 행동으로 실천하는 흑인 인권 운동을 실천한 셈이었다.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연구에만 매진한 카버 박사는 돈이나 명예를 얻을 기회도 많았으나 자신이 발명한 기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카버 박사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빈부나 직업에 상관없이,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을 포함하여-늘 겸손과 정직,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흑인들은 물론이고 백인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 토마스 에디슨, 헨리 포드 등과 같은 세계적인 지도자들의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농부들의 친구였고,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흑인 동족들의 친구였다.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카버 박사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라고 선언한 바 있다.카버 박사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열악했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의 삶을 살다간 조지 워싱턴 카버는 1923년 과학계에 공헌한 공로로 스프링간 훈장을 받았으며 1942년에는 남부의 농업경제에 기여한 공로로 루스벨트 메달을 받았다. 또한 1947년에는 그가 태어난 다이아몬드 그로브의 모세 카버 농장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1951년에는 미국의 50센트 주화에 그의 모습이 새겨졌으며, 1977년 ‘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에, 1990년에는 ‘위대한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다.
「어린왕자」를 읽고어린이를 위한 책이면서도 동시에 어른들에게 더 큰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동화, ‘어린 왕자’. 이 책을 수 차례 읽었지만 읽을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현실과 타협하고 점점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어린시절의 순수했던 영혼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들에게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주기 때문이 아닐까?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비행기를 조종하며 전세계 여러 곳을 누비고 다니던 비행사인 ‘나’는 원래 순진무구하고,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열고 보아야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꼬마 화가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그림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하면서 여전히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가 갑작스럽게 고장이 나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 해버렸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비행기를 고치고 있던 나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어린왕자를 만나게 된다. 사막에 홀로 고립되어 생사의 기로에 선 ‘나’에게 어린왕자는 양을 그려달라고 하고 엉뚱한 이야기들을 펼쳐 놓는다. 처음에는 이 엉뚱한 소년을 조금은 귀찮게도 생각하고 떨어져가는 식량을 걱정하며 비행기를 고쳐 원래를 삶으로 복귀하는 것만을 초조하게 바라던 나는 점점 어린왕자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어린왕자를 통해 그 동안 어른들의 사회에서 인정도, 이해도 받지 못했던 그리운 동심의 세계를 다시 만나게 된다.어린왕자는 비행사에게 자신이 살던 별과 자신이 다녔던 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어린왕자의 별에는 장미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장미는 자존심이 아주 세고 사소한 일로 불평하며 어린왕자를 괴롭혔다. 그래서 어린왕자는 장미의 오만함을 고쳐주려고 자신의 별을 떠나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여러 별을 다니며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게 되었다.첫번째 별에서는 권위적이고 높임받길 원하는 왕을, 두번째 별에서는 자기를 칭찬하는 말 이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허영쟁이를, 세번째 별에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부끄러워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술꾼을, 네번째 별에서는 우주의 5억 개의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세고 있는 상인을, 다섯번째 별에는 1분마다 한 번씩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을, 여섯 번째 별에는 자기 별도 여태껏 탐사해보지 못한 지리학자를 만났다.이들은 모두 남에게 군림하려고만 하는 어른, 위선 속에 사는 어른, 허무 주의에 빠진 어른, 물질 만능의 표본 같은 어른, 분업화 된 기계 문명 속에서 자기 일에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어른, 이론 속에서만 사는 행동이 결여된 어른들을 나타낸다.그러다가 어린왕자가 도착한 일곱번째 별은 지구였다. 어린왕자는 지구에서 지혜로운 여우 한마리를 만나 친구가 되는 법과 길들인 다는 것 등 위의 여러 별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즉 이미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던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신이 길들였던 장미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고, 너도 내가 필요하지 않아. 너에게 나는 다른 여우들과 똑같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할 거야.”“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봐! ”“참을성이 있어야 해.”“우선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저기 풀밭에 앉아. 그리고 매일 조금씩 가까이 와서 앉는 거야. 나는 너를 바라볼 거야. 하지만 너는 잠자코 있어야 해. 말은 오해를 만들어내니까.”“네가 똑같은 시간에 왔다면 더 좋았을 걸.”“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내 마음이 너를 만날 준비를 할 거라고! 네시가 되면 나는 흥분할 거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겠지. 그러면서 행복의 대가를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마음의 준비를 언제해야 할지 모르겠지.” ......길들인 것에 대하여 소중함을 깨닫게 된 어린왕자는 정원에 핀 그 수많은 꽃들이 자기의 장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길들이지 않은 그 장미들은 자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또한 여우는 어린왕자와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준다."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네 장미가 네게 그렇게 소중한 것은 그 장미를 위하여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고 있어. 그러나 너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언제나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야."
인간역사와 환경오염목 차1. 서 론2. 녹색세계사가. 인간의 증가나. 화석연료의 증가와 공업화3. 결 론1. 서 론인간 역사의 기본은 생태계의 법칙에 좌우된다.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광합성체에서 시작하여 초식동물을 거쳐 꼭대기의 육식 동물에 이르는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동식물이 서로 의존하는 복잡한 거미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먹이사슬의 에너지 효율이 점점 낮아지기 때문에 각 단계의 생물체의 수는 점점 작아진다.이러한 먹이사슬아래서 활동하던 고대의 인간들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다시말해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을 영위하였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먹이사슬의 최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인간의 미증유의 증가수치가 그 안정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자연예찬론과 같은, 자연법칙의 순응하는 측면을 강조됐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연을 이용하는 단계를 넘어서 파괴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 책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생각하여 인류역사 중 자연변천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변천사는 인간사회가 생태학적인 속박에서 탈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한 인간의 증가이다. 또한, 화석 연료의 이용과 공업화이다. 이 두 가지 주요 안건은 여러 가지 부산물을 탄생시켜 녹색세계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본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요약, 정리함으로써 자연변천사에서 인간의 행위를 비판하고자 한다.2. 녹색세계사가. 인간의 증가인간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전례 없는 인구의 급속한 증가였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에 대한 원인으로는 전쟁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의 면역성은 유전을 통해 급속히 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요인은 의학기술의 발달이라고 볼 수 있다. 의학기술의 발달은 곧 전쟁의 역사와 연결된다. 전쟁은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나, 외부적인 것은 확장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전쟁기술과 무기의데는 겨우 15년이 걸렸으며, 1980년대 후반에 5억 명으로 늘어나는 데는 12년이 걸렸다.이러한 증가는 지중해 지역보다는 영국과 베네룩스 국가들과 독일 등지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다가 1900년 이후 증가 속도가 줄어들었다. 대체로 유럽등지에서의 인구 증가는 제3세계라 불리우는 제국주의시대의 속국들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있다.) 1500년 이후 400년 동안 유럽이 후진 지역에서 벗어나 세계를 주도함으로써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각 지역간의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팽창되어가는 힘을 이용해, 그리고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문제와 자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열세국가를 침공하는, 소위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인구성장은 출발은 유럽과 같았지만 결과는 매우 달랐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까지 인구가 많이 증가했으며, 유럽과 달리 20세기에도 높은 성장률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증가의 유일한 예외는 일본이다.위와같은 인구의 증가는 폭발적인 식량량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요구로 1860년대에서 1920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4억 헥타르의 새로운 토지가 농지화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급속하게 늘어가는 농지와 다르게 세계인구의 50%이상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것이다. 주로 제3세계에서 농작물이 생산되는 데도 말이다. 제국주의 하의 속국들은 자신들의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식량문제만으로도 심한 곤란을 겪었으나, 그들의 생산량이 본국으로 다량 이송되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이는 제3세계 국가의 토지환경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제국주의의 본국들은 자신들의 필요한 작물을 제3세계에서 조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예제와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대량의 인구를 노동을 위해 이동시켰다.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서구 열강의 회사들은 제3세계국가들의 많은 토지에 여러 농작물을 재배함으로해서 과거에 자연친화적인 농업생산은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생산으로 많은 환경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 또한 강제 노동을 수 있는 것이다.이를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요인은 과학의 발달이다. 운송 수단의 발달과 냉각 기술의 발달은 모든 생산물을 본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1850년 이후 두 가지 중요한 혁신, 농업의 기계화와 집약화의 도입이, 또한 이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짜 혁명적인 기계화는 내연 엔진과 트랙터의 발명이다. 과거의 말이나 노예에 의해 이루어지던 낮은 생산성의 작업이 기계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수확물은 대거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더해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하려는 혼합 비료의 발견은 큰 몫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토지의 이용으로 토지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질소 비료등으로 인한 토지의 황폐화와 휴년을 가지지 못해 토지의 자생적인 부분을 말살시키는 이러한 행위는 앞으로의 지구역사를 종식시켜가는 원인이 된다.식량의 요구는 식품 가공 산업과 대규모 식량 도매업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인공 식품은 많은 환경적인 오염을 가져온다. 자연의 불변의 법칙인 재생산의 원리가 가공식품은 먹히지 않는 것이다. 많은 식품에 대량의 설탕이나 소금, 인공 색소, 감미료, 보존료, 유화제 들이 들어가 있어서 유독성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또한 효율적인 분배가 되지 않아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전 세계적인 나타나는 것이다. 제3세계중 가장 피해가 큰 지역은 아프리카로 전 대륙에서 1인당 식량 공급량이 1960년대부터 감소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수출하는 식량보다 수입하는 식량이 많아졌다. 선진국으로 수출할 상품 작물이 지역 주민이 먹을 식량을 재배해야 할 땅과 비료를 차지해 버림으로써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케냐에서는 영세 농민들을 위한 작품 재배에는 전체 비료의 3%만이 쓰였을 뿐이며, 브라질과 에콰도르에서는 전체 비료의 3분의 2가 상품 작물 재배에 쓰였다.식량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위한 농지확장의 결과로 세계 모든 곳에서 현대의 농경은 삼림의 개간과 초지의 경작, 경사지에서의 농경 등으로 심한 토양 부식을 일으켰다. 또한 들어가는 강으로부터 물을 돌려 쓰자 호수 물의 10%가 줄어들었다. 20세기를 지나기 전에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인구 증가로 인한 현대농업은 여러 업적과 더불어 많은 문제와 환경 파괴를 일으켰다. 전보다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지만 분배가 더 불공평해졌다. 선진국 대부분의 주민들은 부유하고 잘 먹고 있지만 훨씬 인구가 많은 제3세계 대부분의 국민들은 영양이 부족한 상태다. 세계 곡물 생산량 중 상당량을 선진국의 동물이 먹어치운다.식량 증산을 위한 농지를 늘리기 위해서 취약한 생태계를 파손하거나 생태계에 전보다 더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삼림 벌채, 토양 부식, 사막화와 염분화도 이미 상당히 진전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토지의 불균등한 분배로 대다수 사람이 척박한 땅조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거나, 아예 땅 없는 노동자의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인류 역사를 통해 모든 농경 사회가 공통으로 떠안은 과제, 즉 모두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한다는 과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농경이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그것 자체가 파괴적인 요소가 되어 점점 환경을 파괴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취약한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117-118p)나. 화석연료의 증가와 공업화인간 사회가 구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사회 활동의 활력과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에너지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산출되는 에너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농경과 정착 사회의 등장에 비견할 만하게 중요한 인류 역사의 두 번째 큰 변화는 지구의 막대한 화석 연료의 사용이다.기본적인 인간의 에너지 요구는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조명과 열 공급원이고 두 번째는 농사, 건축, 산업이나 이동 등의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동력원이다. 지난 2000년 이전까지 인간과 동물은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동력원이었다. 이를 더해 발달한 것이 수력과 풍력이다.19세기까지 전 세계는 장작을 주연료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뒤에도 매우 서서히 개발되었다. 19세기 들어서 석탄 생산량은 급증하였고 세계는 에너지 소비량의 95%를 이에 의존하였다.19세기의 에너지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연료에서 매우 편리한 2차 에너지인 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수력발전으로 조달하던 전기는 이제 화석 연료를 태우는 화력 발전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석탄, 다음에는 석유 그리고 천연가스를 이용했다.수세기 동안 석유는 지표면에 새어 나온 것을 거두어 선체의 누수를 막는 충전재나 약품으로 사용되었다. 상업적으로 석유를 채취하려 한 시도는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초기의 값싼 석유의 공급은 20세기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1970년대에 에너지 소비의 50%를 능가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유전 개발에 따른 가장 중요한 부수적인 현상은 선진국에서 에너지 자원으로서 천연가스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와 20세기 에너지 역사의 특징은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연료 소비의 급증이다. 새로운 대안은 수력 발전과 원자력 두 가지뿐이다.그러나 이러한 에너지 또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착취와 편재된 관계로 심한 불균형을 자아냈다. 이를 더해 에너지가 유한한 관계로 문제의 양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지난 1만년 동안 인간의 에너지 소비 양상은 수렵채취인들의 최소한의 필요로부터 현대 미국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변화했다. 에너지를 얻기 위한 방법도 장작을 줍고 인력과 축력을 사용하는 것에서 수력이나 풍력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기계가 발명되고, 석탄 광산, 유전 개발, 전기 발전, 원자력 발전에 이르기까지 점점 복잡해져 왔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소비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으로 에너지가 무한히 있는 것처럼 소비만을 강조해 온 것이다.화력자원의 개발과 공업화를 야기시킨 중요한 원인을 찾는다면 도시의 형성을 들 수 있다.고대의 소수를 이루던 도시인구는 .
노동복지에 대하여1. 노동복지의 정의노동복지란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을 유지·향상시키기 위하여 서로가 경합 내지 보완하고 있는 제시책의 총칭이며, 이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기업복지(근로복지)☞ 노동조합복지(협의의 노동복지)☞ 사회복지(최광의의 사회보장)로 분류할 수 있다.기업복지는 주체가 되는 기업이 종업원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독자의 복지활동을 전개하는 것이고, 노동조합복지는 주체가 되는 노동조합이나 근로자 단체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자주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사회복지는 국가 및 지방의 제기관이 광범위한 근로자를 대상으로 공통된 필요 최소한의 복지를 실현하려는 것이라고 각각 규정하고 있다. 특히 기업복지의 구성항목에는① 고용(정년제를 포함)② 교육훈련③ 인사처리④ 노동·여가시간⑤ 임금⑥ 퇴직금⑦ 복리후생⑧ 안전위생으로 구분하며,기업복지의 개념은 종래부터 사용되고 있는 복리후생의 새로운 견해 내지 명칭으로써, 기업복지의 영역은 종래의 복리후생과 달리 복리후생의 협의의 기업복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복리후생을 정의하면, "노무관리의 일환으로서 기업이 종업원의 노동력의 보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생애에 걸친 생활유지 및 향상을 꾀하기 위하여 종업원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여 임금 등의 주된 노동조건의 보완으로서의 물적·정신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면 노동복지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산재보험의 의의와 필요성 그리고 그 특성과 이의 적용, 산재보험과 관련된 제도들을 기술한 후 마지막으로 산재보험의 급여체계에 있어서 개선할 사항과 발전방안에 관해서 살펴보자.2. 산재보험가. 의의와 필요성산재보험은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급격히 증가하는 산업재해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1964년 여타 사회보장제도 중 가장 먼저 도입되었다. 초기의 산업재해는 건설현장과 위험한 기계기구를 설치, 사용하는 사업장에서 주로 발생하였으나 산업사회의 현대화, 고도화, 정보화 등으로 재해 발생원인도 신종 직업병과 과로, 스트레스 등에 기인한 재해가 증가하는 추세이가장 바람직한 것이나 이미 발생한 산업재해로 인하여 부상 또는 사망한 경우는 그 피재근로자나 가족을 보호 내지 보상해 주는 산재보험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산재보험은 피재근로자에게 확실한 보상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가 책임을 지는 의무보험으로 역사적으로는 사용자의 피재근로자에 대한 근로기준법상 형사책임과 보상책임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로서 국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적용대상이 되는 사업주로부터 소정의 보험료를 징수하여 법령이 정한 바에 따라 피재근로자에게 보상을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험이다.나. 특 성(1) 자진신고 및 자진납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2) 타 사회보험은 개별보험자 단위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산재보험은 사업장 중심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3) 사업주의 고의·과실의 유무를 불문하고 업무상의 재해에 대하여 사용자에게 무과실 책임을 부과한다.(4) 산재보험에 의한 재해보상은 일반 법원을 통한 권리구제와 달리 산업재해로부터 입은 피해를 시급히 복구하여 보호하며, 행정행위에 의한 재량 또는 담당직원의 자의에 따라 좌우되지 않은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업무상 재해를 당한 근로자를 적기에 확실히 보상해 준다.(5) 사업자가 자금난으로 보상을 행하지 못하거나 피재근로자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포기를 유도하는 경우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평소에 보험관장자가 사업주로부터 일정액의 보험료를 징수하고 이를 재원으로 하여 재해보상을 하게 되는 사회보험방식을 채택하였고, 산업재해를 입은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존권 보장을 그 기본이념으로 하는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가장 핵심이다.다. 산재보험의 적용(1) 적용대상(가) 사업 또는 사업장1) 산재보험은 보험급여 대상을 적용 사업장의 피재근로자(그의 유족을 포함)로 하고 있으나산재보험의 적용단위는 사업 또는 사업장이다.2) "사업"이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업으로 행하여지는 계속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 단위로서 그 목적은 영리성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3) "사업장"이란 사업이 행하여사업 또는 사업장의 판단기준은 그것이 사업장이든 공장이든 그 자체에서 인사·회계운영 등이 최소한의 경영체제로서 독립성의 유지 여부이다.(나) 적용대상사업장의 구분 및 판단기준1) 계속사업에 있어서 동일한 장소에 있는 것은 하나의 사업으로 하고 장소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별도의 사업으로 적용함을 원칙으로 함. 다만, 계속사업의 본사, 지사, 출장소 등이 장소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경우에 근로자수가 적용대상 이상이면 별도 적용하여야 하고, 적용대상 미만이고 조직적으로 주된 사업에 대하여 독립성이 있다고 인정될 수 없는 것에 한하여는 주된 사업에 포함하여 전체를 하나의 사업으로서 적용함.2) 선원법 또는 사립학교교원연금법에 의하여 보상이 행하여지는 사업은 산재보험적용 제외이나 선원법 등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일용근로자 등이 5인 이상이 될 때에는 적용대상이 됨.3)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중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행하지 아니하고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대한적십자사, 대한나관리협회, 국립대학교병원, 서울대학교병원, 대한가족협회, 대한결핵협회 등은 당연적용.4) 사회복지사업 중 장애인 등을 수용, 제조업을 병행할 경우 총매출액 중 교부금이나 보조금 등의 금액과 자체 제조하여 판매한 매출액을 비교하여 자체 판매한 매출액이 많을 경우에는 해당 제조업으로 적용되고 교부금이나 보조금이 많을 경우에는 사회복지사업으로 적용됨. 또한, 장애인 등을 일정기간 기능훈련(재활훈련)후 사회 복귀시키는 훈련기관은 재활훈련생을 제외한 인원을 기준으로 적용되고, 장애인을 고용할 경우에는 주된 업종에 직원과 함께 적용조치됨.(2) 당연적용사업(가) 당연적용사업의 내용당연적용사업이라 함은 사업이 개시되거나 사업이 적용요건을 충족하게 되었을 때 사업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보험관계가 성립하는 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다음의 적용제외 사업을 제외한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은 당연적용대상에 해당된다.(나) 적용제외 사업1) 임업중 벌목업으로서 벌목재적량이 800㎥ 미만인 사업2) 국제 및 기서 직접 행하는 사업4) 선원법 또는 사립학교교원연금법에 의하여 재해보상이 행하여지는 사업5) 기간의 정함이 있는 사업 또는 계절사업으로서 연간 연인원 1,350인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6) 건설공사중 총공사금액이 4천만원 미만인 공사 또는 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한 주택사업자 기타 건설산업기본법에 의한 건설업자가 아닌 자가 시공하는 공사로서 주거용 건축물은 연면적 661m2 이하, 기타의 건축물은 연면적 495m2 이하인 건축 및 대수선 등에 관한 공사7) 제 "1)" 내지 "6)"의 사업외의 사업으로서 상시 5인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다) 한국표준산업분류표를 기준으로 한 당연적용사업 예시1) 농업, 수렵업, 임업 및 어업2) 광업3) 제조업4) 전기·가스 및 상수도사업5) 건설업6)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 수리업7) 운수·창고 및 통신업8) 금융·보험법(1998. 7. 1부터 신규적용)9) 숙박 및 음식점업10) 부동산 임대 및 사업 서비스업11) 교육서비스업12)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13) 기타 공공·사회 및 개인서비스업(회원단체 제외)(3) 임의적용사업(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사업으로서 산재보험 가입여부가 사업주의 자유의사에 일임되어 있는 사업※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사업라. 산재보험 관련 제도(1) 수급권의 보호(가) 의 의근로자의 생활안정과 건강회복 및 유족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므로 제3자에게 양도 또는 압류할 수 없음을 명문화하여 피재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안정을 도모하고자 한다.(나) 내 용1) 수급권은 퇴직·휴직 등을 이유로 소멸되지 않는다.(단,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에 의하여 소멸)2) 수급권의 양도 불가(단,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가족 또는 사업주에게 보험급여 수령위임 인정)3) 압류불가:민사상의 강제집행이나 세무상의 체납처분에 의한 청구권 압류 불가(2) 미지급의 보험급여(가) 의 미각종 보험급여의 청구권자는 당해 근로자나 그 유족(장의비는 그 장제를 행한자)이나, 동 수급권자가 보험 할 보험급여 중 미지급된 급여에 대하여 그 유족에게 지급하는 제도이다.보험급여의 수급권도 일종의 재산권이므로 민법의 규정에 의하여 재산상속인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이나, 업무상 재해의 경우 신속한 보상을 위해 상속에 관한 민법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다.(나) 청구권자1) 미지급보험급여가 요양비, 휴업급여, 장해급여, 상병보상연금 및 장의비인 경우에는 사망한 근로자의 유족이 청구권자가 되며, 이 때의 유족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0조 및 동법 시행령 제46조 규정에 의한 유족의 결정방법에 따라 인정2) 미지급보험급여가 유족급여인 경우에는 유족 중 차순위 수급권자가 청구권자가 되며3) 미지급보험급여의 청구권자가 미지급보험급여를 청구하기 전 또는 청구하였으나 지급되기 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시행령 제45조의 규정에 의한 유족중 차순위 수급권자가 청구권자가 된다.(다) 청구절차1) 수급권자가 청구하고 지급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그 유족의 명의로 수령2) 수급권자가 보험급여를 청구하기 전에 사망한 경우는 유족의 명의로 청구, 수령(3) 부정이득의 징수(가) 의 미허위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수령한 자와 허위신고 또는 허위증명 등 부정한 방법을 통하여 보험급여를 수령하게 한 사업주에 대하여 그에 상응한 제재를 가함으로써 공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나) 징수금액1) 수령한 보험급여액의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징수, 사업주의 허위보고 및 증명시는 연대 책임2) 단, 고의 또는 과실이 아닌 경우에는 보험급여액만으로 한정(다) 징수절차부정사실에 대한 공단의 통지를 수령한 후 30일 이내에 납부※ 부당이득의 징수수급권이 소멸 또는 정지된 보험급여를 지급받은 자가 있을 때에는 정당한 보험급여액을 초과하는 금액을 공단에 납부(4) 제3자에 대한 구상권(가) 의 의1) 제3자의 행위로 인한 재해 발생시 피재근로자의 보상에 있어서 재해의 책임이 있는 제3자의 책임면탈을 방지하고 보험재정의 확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제3자 행위"란보험가입자(사업주)와 행위
경제학파에 대해서목 차들어가면서1. 원시 공동체의 경제 생활2. 고대 노예제 사회3. 중세 봉건제 사회4. 중상주의5. 중농주의6. 고전학파7. 역사학파8. 한계효용학파9. 캠브리지 학파10.케인즈학파11. 통화주의 학파12. 합리적 기대학파13. 공급중시학파들어가면서인류의 역사, 즉 인간의 경제생활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는 노동주체인 인간 개개인이 노동의 객체인 자연에 대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자연을 어떻게 변형 개조해 왔는가 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당초에 생산력이 낮은 발전단계에 있어서 노동의 객관적 조건이 '자연' 그 자체이고, 그것에 대응해서 노동의 주관적 조건인 노동주체도 자연적 개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개인이 대지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고 자연 그대로의 도구를 가지고 작용함으로써 스스로의 물질적 재생산과 함께 사회관계 또한 재생산해 왔던 것이다.경제활동은 문명화가 되기 이전부터 인간생활과 깊은 관련을 맺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까지는 경제활동에 대한 전형적인 분석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15세기 경 부흥된 중상주의는 주로 농경적인 유럽사회를 배경으로 점차적인 무역의 증가가 일어난 시기였고, 사회적 학문으로서 경제학의 탄생에 대한 무대를 마련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경제학적 연구들은 개인적이고 지적인 반응을 비롯되어 그 시대의 문제로 발전된 것이었으나 어떠한 분석체계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중반을 지나 스미스(A.Smith)에 의한 고전경제학의 탄생으로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 원시 공동체의 경제 생활인간이 정주생활을 시작한 당시의 사회조직을 원시공동체라고 부른다. 다르게는 원시 공산제, 씨족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 인간은 수십 명 단위로 모여 살았다 .하나의 단위는 혈연으로 뭉친 대가족으로서 현재와 같은 일부일처제에 기초한 소가족이 독립하여 생활 할 수 있는 조건은 되지 못하였다.농업생산력이 낮아서 1년 동안 일해서 수확한 곡물만으로는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이 시대세기의 이탈리아에서 노예제 사회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세계는 전체로서는 노예제 사회가 실현되지 않았지만, 항상 노예제 사회로의 경향성을 존재하고 있었다.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로마제국을 보면 로마 시민공동체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기원전 2-1세기에 노예제가 농업을 장악하여 노예제 사회가 실현되어 있었다.장기간의 로마의 평화는 산간오지 지역의 분해를 가져오게 된다. 이때부터 농업 생산수단의 자원으로서 이용하였던 노예를 전쟁의 군사로 이용하게 된다. 이 노예군들은 농경에서의 조방적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 귀중품이 되어간다.그리스·로마 고대의 지중해 세계 전체가 노예사회라고 전제한다면, 노예제 사회의 마지막 시기는 로마제국의 종말과 시기가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을 계승하는 러시아 사학계의 주류파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에 덧붙여 "노예의 혁명이 노예소유자를 제거하고 노동자 착취형태로서의 노예제를 지양했다."고 하는 스탈린의 발언에 의해서 로마말기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노예혁명의 형태를 추구하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로마 말기의 농민반란을 노예혁명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 등이 확인되었다.3. 중세 봉건제 사회◎ 시대적 배경-제도적 특징AD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으로부터 18세기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약 1천년간의 장구한 세월을 중세 사회 라고 한다.중세의 사회구조는 일반적으로 봉건제 사회(封建制 社會)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대토지 소유의 기초 위에 축성된 봉건질서와 이 시대 말기에 발흥한 도시의 발전이다. 로마 말기에는 라티푼디움 이라고 부르는 대토지 제도가 행하여졌고, 이 토지소유는 게르만족이 로마를 정복한 후에도 더욱 발전하여 장원을 형성하였으며, 일편에는 대토지를 소유하는 왕, 귀족, 영주, 교회 등의 특권 계급과 토지 위에 속박되어 노동을 제공하는 예농 즉, 농노간의 계급 구분이 나타났다.전자는 후자에 그 소유하는 토지의 일부분의 사용수익권을 부여하는 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수도승들의 종교적인 지침에 따라 경제활동에 대한 분석보다는 종교적인 신조와 조화되는 경제행동의 법칙을 중시했다.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미성숙 된 경제적 변화들에 적응하기 위한 시도로써 경제적 사고의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 사적 재산권제도, 공정가격의 개념, 고리대금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스콜라주의의 저작물은 종교적인 신조와 서로 조화되는 것으로 경제적 활동 측면을 점차 부각시키고, 경제적 조건에 대한 교리의 미묘한 수정작업을 해내었다.4. 중상주의◎ 역사적 배경중상주의는 15세기 후반부터 국가사회가 대두하여 앞을 다투어 부국 강병책을 추구하고 신대륙이 발견되어서 새로운 부를 축적할 계기가 생기면서 체계화 되었다. 그 시기에는 종교혁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결코 죄악이 아니라는 윤리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초기 중상주의가 성립되었던 단계에서는 확고한 중심 인물이 없었고 전문적 경제학자도 없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상인, 정치가, 관료, 철학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사회적 현상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시정할 것이나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다.그 내용의 요지는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 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을 기르는 방법에 있어서 중상주의자들은 무역을 절대시하고 특히 무역의 차액으로서 금은 보화를 많이 축적하면 나라가 강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중세 유럽사회는 동양과는 달리 봉건영주국가로 구성되어 있었고, 민족의식이 희박했다. 따라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필요한 군대를 살 수 있었다. 재력만 있으면 국방, 외교, 경제, 정치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황금이야말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졌다고 보았다. 금은 보화는 수출을 많이 하고 수입을 적게 할수록 모을 수 있으므로 무역을 강조했다고 해서 중상주의(Mercantilis성장을 촉진하는 최고의 정책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했다. 물질적 가치의 창출을 연구했고 부의 기원은 농업 또는 자연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주요학자들·케네(Francois quesnay)소득의 흐름을 마치 인체에 있어서 혈액순환과 같이 보고 경제표를 작성하였다. 경제표 란 지주, 농민, 장인계급이 질서있고 조화있게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하는가를 일목요연 하게 보여주는 표이다. 이 표는 오늘날 투입산출표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미라보(Mirabeau, 1715-1789), 느무르(Nemour, 1739-1817), 바듀(Baudeau, 1730-1792)·튤고(Turgot, 1729-1781), 트로네(Le Trosne, 1728-1780)튤고는 재무상으로 세제를 개혁하고 농업을 진흥시킴으로써 프랑스 재정을 정상화 시키 려 했으나 실패, 중농주의이론을 정책에 반영하고자 노력6. 고전학파◎역사적 배경고전학파란 18세기 후반부터 1860년대까지 영국을 지배한 경제학파로서 스미스(A. Smith), 리카도(D. R. Ricardo), 맬더스(T. R. Malthus), 밀(J. S. Mill)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단의 경제학자들을 망라한다. 고전학파 경제학이 정립된 시대적 상황과 시대정신 및 그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나 군주정치의 체계를 뒤집어 놓았고, 미국의 독립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확고하게 토착화시켰으며, 산업혁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고전학파는 자본주의 경제를 자율성을 갖춘 재생산체계로 파악하고 그 구조와 법칙을 규명했다. 이 학파는 먼저 원시적 축적이 끝나가는 단계의 영국 자본주의 현실에 입각하여 그 결론인 자유주의의 현실적 정책에 효과적인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다는데 역사적·실천적 의미가 있고, 다음으로 최초의 포괄적 과학적인 경제학체계로서 그 후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거나 비판받으면서 새롭게 발전해 가는 기초로 되었다는 데서 경제학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전학파의 시조 스미스는 『국부론』에도래되었고 그 일을 담당한 것이 후진국의 자본가와 국가 권력을 매개하는 관료층이었다. 후진적 경제구조를 개선시키고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일은 강력한 국가 권력으로 경제생활의 모든 분야를 보호·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하에 등장한 것이 역사학파이다.◎주요학자들역사학파는 구역사학파와 신역사학파로 양립된다. 구역사학파의 대표자는 리스트(Friedrich List)이고, 그 밖에 롯셔(W. Roscher), 힐데브란트(B. Hildebrand)등이 있다. 신역사학파의 대표자는 슈몰러(G. Schmoller)를 들 수 있다.- 특징1.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조직으로서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의 이익 밑에 두어야 한다.2. 고전학파의 추상화와 연역화에 반대하고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며 이론의 일반 적인 연구 대신에 구체적인 역사자료의 분석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3. 경제현상을 일반문화현상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 유기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8. 한계효용학파◎역사적 배경사회주의 및 노동조합운동에 반대하면서 그리고 또한 역사학파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고전학파와 같이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방임정책을 옹호하는 학파가 1870년대에 등장하였는데 이 학파가 한계효용학파이다. 1870년대에는 서구 각국의 경제가 대체로 지속적인 성장을 실현하는 가운데 노동의 생산성과 모든 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한계효용학파는 사회주의 경제학파이론의 독단성을 배척하고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하여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다.한계효용학파라는 이름은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객관적 가치설을 부정하고 주관적 가치설을 주장하며 상품의 가치는 한계효용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주장한데에서 나왔다.경제학의 주된 대상을 인간의 경제행위를 고찰함에 있어서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가 함께 다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거의 무시되었다. 이러한 고립된 인간이 자기의 만족을 중대시키기 위해 행하는 합리적 경제활동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일정한 경제법칙을 끌대,
감가 상각비목 차1.들어가면서.....,2. 감가 상각이란...,3. 감가상각의 대상과 내용 년수4. 감가상각방법1.들어가면서.....,통상 기업과 단체등 어떤 영업활동이 수행되는 곳이면 언제나 세금이 따르게 되며, 세금을 제외한 세후수익으로만 기업의 정확한 순현가나 수익률등을 계산할 수 있다. 이러한 세금은 전체 총 수입에 대하여 부과되는 것은 아니고 과세대상소득에 대하여 부과가 되며, 이 과세대상소득의 크기는 총수입에서 재료비, 임금 등의 운영비와 감가상각, 그리고 사체 이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된다. 따라서 감가상각의 크기를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세금의 크기를 정할 수 없고 또 기업의 순수익등 세후소득은 논할 수 없다. 그러면 세금을 정하는 방법에 관련해 감가상각비를 어떻게 계산하는지 알아보자.2. 감가 상각이란...,한 사업의 생산활동에 쓰이는 기계나 생산장비와 같은 고정자산은 물리적 혹은 기능적인 원인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가 감소한다. 이와 같이 가치가 감소하는 현상을 감가 상각이라 한다. 그러나 같은 설비라 하더라도 그 설비의 사용환경이나 사용자의 능력 또는 사용의 강도 등의 여러 가지 용인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똑같이 감가상각이 된다고 말 할 수 없다.비슷한 예로서 우리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경우도 도로의 포장여부나 사용자의 숙련도, 그리고 연간 운행거리 등에 따라서 그 가치의 감소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종의 설비에서도 많은 차이가 방생되는 데 하물며 다른 종류의 설비에 대하여는 그 감가상각의 크기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세금을 북과하기 위해서는 감가상각의 크기를 결정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각 설비의 실질 가치의 감소에 따라 각각 매년 감가상각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따라서 세금의 부과를 위하여 같은 종류의 설비에 대하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크기를 결정하여야 한다는 지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침은 같은 종류의 설비에 대하여 실질 감가상각의 크기를 대표할 수 있는 감가상각의 크기를 결정하도록 노력하였으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가상각의 개념은 첫째, 실질 감가상각 둘째, 세법상의 감가상각으로 크게 두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실질 감가상각의 발생원인은 첫째, 파손등에 의한 물리적 열화 둘째, 기능의 저하로 인한 기능적 열화 셋째, 상대적 열화인 진부화 넷째, 필요성의 감소 등으로 나눌수 있으며 이는 경제적 감가상각(economic depreciation) 이라 불린다.. 이는 기업이 설비를 처분할 때라든가 실질가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진다. 여기에 반해 세법상의 감가상각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어떤 설비의 공통적인 감가상각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그 크기가 결정되어진다. 이는 전체 설비의 실질 감가상각의 크기와 유사할 수 있으나 정책적인 면도 많이 포함된다. 이러한 감가상각방법을 회계적 감가상각(accoount depreciation) 이라 하고 이에 대한 견해는 국가별로 다르다. 미국이나 영국은 두 상각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고 일본이나 독일은 같아야 한다는 견해이다..실질 가치의 산출은 가치 자체가 상당히 주관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어 객관적인 화폐의 크기로 평가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으나 대개 다음 세 가지 방법에 의해 결정되어진다.1. 비용가치 소용된 비용에 감가 상각을 고려해 평가하는 방법이다.2. 시장가치 시장에서 매매가 이루어지는 가격에 의한 평가 방법이다.3. 수입가치 향후 발생가능한 수입의 현가의 크기로 평가하는 방법이다..이러한 실질가치의 감소를 주어진 기간의 감가상각으로 정의하는 것이 경제적 감가상각 방법이다. 이는 회사 자산의 평가나 운영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회계적 감가상각에서 감가상각의 크기는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의 일환으로 일반 운영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과세대상소득에서 제외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감가상각은 일반 운영비에 비하여 다른 성격이 있는데. 일반 운영비는 그때그때 지출이 되나 설비에 소요되는 초기비용은 사업초기에 이미 모든 지출이 끝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설비는 수명기간 동안 계속 사용하는 것이므로 초기비용은 사실상 수명기간에 걸쳐서 사용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비용을 수명기간으로 분배하여 1년에 얼마씩 소요된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인위적인 분배과정이나 방법을 회계적 감가상각에서 다루는 것이다.즉 고정자산의 가치감소를 인위적인 계산방법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추정하는 회계절차를 회계적 감가상각이라 한다. 이는 생산원가의 배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각 방법에 따라 회계적 감가상각의 크기는 달라진다.3. 감가상각의 대상과 내용 년수감가상각의 대상과 내용연수는 세법에서 정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국가 마다 다르다. 최근 1995년도에 개정된 우리나라의 세법을 중심으로 감가 상각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자.(1) 감가상각의 대상자산감가상각의 대상자산은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사업에 고정자산을 사용할 때 시간의 경과에 의하여 그 가치가 감소되는 자산이다. 단 구입가격이 거래단위별로 30만원 미만인 소액자산은 재외되며 무형고정자산의 경우는 그 자산을 구매한 경우만 감가상각이 허용된다. 구입가격은 초기비용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지불된 설비의 가격과 설치비, 운반비, 세금 등 생산에 들어가기 이전에 소요된 모든 비용의 합으로 이루어진다.(2) 법정잔존가치법정잔존가치 또는 법정잔존가액이란 고정자산이 그 법정내용년수의 전부가 경과되고 이용불가능하게 된 경우, 전용할 수 있는 잔존재료가치를 세법상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세법에서는 과거 무형고정자산은 잔존가치를 0으로 하고 유형 고정자산은 일률적으로 취득가액의 10%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세법은 1995년도에 대폭 개정되어 유형고정자산의 경우도 무형고정자산과 같이 잔존가치를 0으로 하였다.(3) 법정 내용 년수고정자산은 그 구조 사용되는 업종, 종류별로 기준 내용년수 및 내용년수의 범위 등이 법인 세법에 규정되어 있다. 사용수명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법인세법에 규정되어 있는 사용수명을 법정내용년수라고 한다. 이는 세법상 감가상각의 크기를 결정하기 위한 고정자산의 사용수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실제 유효수명을 기준으로 제정되었으나 납세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실제 수명보다는 대개 짧은 것이 보통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책적인 차원에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통상 실제 내용년수와는 차이가 있다.(4) 고정자산의 재평가인플레이션에 의하여 화폐가치가 변동한 경우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난 고정자산의 장부 가격은 현재의 유통가치보다 현저히 저평가 된다. 그러면 최근에 설치된 유사한 자산이 현재 취득가격으로 감가상각할 경우와 비교할 때 종전의 자산은 감가상각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훨씬 작게 되어 세제상 불이익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불이익을 제거하고 많은 감가상각을 계상하기 위해서 자산을 재평가한다.4. 감가상각방법감가상각의 방법은 크게 나누어 개별자산상각과 집합자산상각으로 나눌 수 있다. 개별자산상각은 보통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각 자산별로 한 단위를 기본으로 감가상각을 행하는 방법이다. 집합 자산 상각은 개별자산이 단위별로는 그 액수가 적다든지 또는 다수의 동일한 자산이 존재할 경우 개별단위의 걔산이 번거롭거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를 묶어 한꺼번에 계산하는 방법이다. 이외에도 준감가상각이 있고 소모상각등이 있다.여러 감가상각의 형태중 가장 일반적인 개별자산의 감가상각방법을 살펴보자. 여러 가지방법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허용되는 감가상각방법은 세가지가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5.16쿠데타의 발생배경목 차I. 군부적 요인가. 군부의 형성나. 2공화국의 군부통제의 실패다. 5.16의 군부내적 원인II. 장면정권의 붕괴요인가. 정치권 내부의 갈등나. 경제적 요인III. 미국의 개입문제가. 경제적 요인나. 이데올로기적 영향군부적 요인군부의 형성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군에 뜻을 둔 많은 인사들은 저마다의 군경력과 연고를 중심으로 군사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세력은 일본군출신의 장교들,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 그리고 중국군 출신과 광복군 출신들이 었다. 그러나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할 뚜렷한 주도세력이 없었기에 우후죽순격으로 난립되어 19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의 수효는 무려 30여개에 달하였다.) 한용원 『창군』 박영사 1984 p26김정곤 「5.16 군사 쿠데타의 발생배경과 원인」 동아대학교 1992 . p12에서 재인용이러한 단체들은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 국방 경비대'의 공식발족과 함께 통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김세진 「한국군부의 성장과정과 5.16」 『1960년대』 거름 1984 p97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군 내부에는 출신성분이 다른 여러 인적자원의 결합체였다.군경력자들의 해방전후의 동향과 일반적 속성을 각 출신군별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후 미군정의 창군정책에 다수 참여하게 되는데, 일본군에서 복무한 경력으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웠고, 다른 한면으로는 군국주의의 습성으로 프라이드가 강하여 한에 뭉치기도 어려웠으며, 미군정기에는 군 고문과 제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미군 고문과도 충돌하는 사례도 잦았다. 둘째, 만주군 출신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후 세운 만주국에서 복무한 군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의 특성으로는 일반적으로 당시 만주군 속에 혼재해 있던 5족(한.일.만.몽.한)간의 경쟁속에서 생존능력이 배양되었고, 만주군에는 원래 일본인 고문이 상주하였던 까닭으로 일본육사 출신들과는 달리 고문관 제도에 익숙해 있었다. 따 라서 많았다. 다섯째, 중국군 . 광복군 출신들이다. 이들은 초창기에 광복군의 법통과 임저의 승인을 요구하며 기군정의 창군정책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뇌부는 청년운동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야 특별 임관되어 고위장교로 다수 배속되었으나, 김구의 몰락과 이범석의 쇠퇴라는 정치적 변화 및 일본군 . 만주국 출신의 군내 득세로 인하여 쇠퇴하고 말았다.2공화국의 군부통제 실패민주당 정부는 경찰 숙청의 과정에서 사회통제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연고, '민주적'지향성 때문에 군부의 환심을 사지 못하였다. 군부 내에서의 불만은 두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계급승진에 대한 불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거 자유당 때 고위장교들이 정치에 개입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 한편 민주당 정부의 몇 가지 정책들은 군부의 분노를 샀는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이 병력의 감축문제였다. 더욱이 군부는 국회에서 군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을 때 정부가 군부의 순수성을 옹호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은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다른 이유는 민주당이 군부 숙청을 단행할 것을 약속해 놓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외에도 군부는 장면정권의 학생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었고, 저부가 경제 및 군사정책에 있어서 미국의 압력에 대해 굴종적인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대해 상당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층은 군부에 관한 정보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군부가 과거 자유당과 협력했으며, 또한 민주당의 민간 정치인들이 군부 인사들은 천한 계층으로 간주) 민주당 정권 참여자들은 자유당사람들이나 군정 인사들보다 지주계급의 배경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미주당 인사들의 41%가 지주자제들인데 반해, 자유당 인사들 중의 37%, 군정 인사들의 26%만이 지주의 자제들이다. 민주당 인사들의 22%가 유교를 신봉한다고 한 반면에 자유당과 군정의 참여자들은 각각 18%와 9%만이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또한 민주당 정권의 참여자들은 전통시대의 한국에서을 지고 ㅈ3ㅏ진 군에서 물러가라고 충고한데서 비롯되었고 8명의 8기생 중령들이 육군참모총장에게 정군건의를 위한 연판장을 제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군부정화를 위한 5개의 조치 : ①1960년 대통령 선거를 독려하는 데 있어 자유당에 협력한 고위군장교의 처벌. ②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장교의 처벌. ③부패하고 무능한 지휘관의 제거. ④군의 정치적 중립과 파벌주의 제거. ⑤군인에 대한 처우개선.(김정곤 앞의 논문 pp 47 - 48)송요찬은 이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정군파 장교들중에서 김종필, 김형욱, 석정선등이 예편함으로써 정군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으나 이사건은 곧장 5.16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교량이 되었다. 정군운동이 진행중이던 1960년 9월 10일 소위 '충무장 결의'라는 것을 통해 처음으로 쿠데타를 모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평화적 방법의 정군문제를 지양하고 직접 무력으로 민주당정권을 전복키로 결의한다.육사 8기생들이 정군운동에 앞장서게된 배경을 알기 위해선 육사 8기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육사 8기생은 첫째, 인원수가 다른 기에 비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둘째, 8기생들은 육군사관학교라는 명칭하에 졸업한 최초의 기였다. 이들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육기간은 짧고 연령에 있어서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선배들과 4년제 정규육사를 졸업한 11기 이후의 장교들에 의해 지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셋째, 8기는 일분군이나 중국군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민간인 출신이 많았다.그리고 반공 운동을 한 경력자들이 다수 입교하였다. 또한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었던 관계로 파벌주의와는 상대져으로 연관을 맺지 않았다. 넷째, 8기중 성적우수자 30명은 일선으로 배치되지 않고 곧바로 육본에서 근무하던 정보.인사.작전.군수 등 참모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사회부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군생활을 해왔다.장면정권의 붕괴요인정치권 내부의 갈등4.19 혁명으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붕괴 후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했다(60연신 정치인들로 구성된 한민당과 상해 임정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신파는 1955년 이전까지 무소속이나 자유당에 소속해 있다가 1955년 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던 인사들로 이들 중에는 관료를 지낸 사람과 기타 이승만의 관직 분배에 불만을 품고 자유당에서 이탈한 사람들, 흥사단 출신의 인사들(장면도 흥사단 출신임) 에 의해 결성되었다. (김정원 『분단한국사』 동녘 1985 . p.246)7.29 총선후 내각 책임제의 헌법하에서는 행정 각부의 각료들이 의원중에서 선출될 뿐만 아니라 의회는 대통령을 선출하고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을 인준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었다 이는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인준을 받기 위해 많은 수의 의원들에게 관료직을 약속해야 하고 토한 많은 수의 의원들에 대한 임명 약속을 지키기 이해서는 부득이 개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리로 임명된 장면은 구파 1명, 무소속2명을 제외하고 전부 신파만을 등용하는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결국 내각이 신파 중심으로 조직되자 구파는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으며, 또한 신파 내에서도 기존의 노장파 의원들과 구파에서 탈당하여 신파에 가담한 소장파 의원들이 이철승을 중심으로 '신풍회'를 조직하여 신파 내부에서의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민주당은 당초 민.참의원에서 80%라는 막강한 다수 세력을 확보했지만, 정치조직 내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장면의 민주당 내각의 지지도는 크게 약화되었고, 따라서 장내각은 신.구파간의 파벌싸움,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으로 인해 9개월간의 집권 기간중 3회에걸쳐 전면 개각을 단행해야만 했다.경제적 요인민주당이 명백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정권이 집권기간 동안 독자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고 단지 대중의 압력에 순응함으로써만이 권격을 유지하려한 정책 지향을 취했다는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60년 자유당 정권 말기의 3.15 부정선거를 전후하여 그나마 취약했던 한국 경제는 다시 재정, 금융면에 난맥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15% 물가 상승, 인구증가율 2.9%에도 못미치는 경제 성장률실업률 23.7%,생산량 9.8% 감소)) 김정곤 『5.16 군부 구테타의 발생배경과 원인』 동아대학교 1992. 그리고 민주당 정귄의 국가예산에서 원조 자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52%나 되었으며, 이 사실은 당시 한국경제가 사실상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생각까지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여론의 요규에 의해서 채택된 '경제개발제일주의' 정책도 5.16 구테타 정부수립후에나 가능하게 된다. 게다가 61년 봄에 접어들어 전국적으로 식량난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심각한 기근이 나타났다. 이러한 당시 한국이 당면한 모든 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요인은 국회에서의 파벌떠문에 효과적인 경제 정책도 실천하지 못한 민주당 정부의 무능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장면 정권의 무능함과 부패는 군부 세력에게 구테타 정당성의 빌미로 제공되었다고 할 수 있다.미국의 개입문제장면정권에 대한 미국의 제약은 최종심급에서는 미국의 세계전략 때문이지만 견제적인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정황적인 요인, 그리고 구체적인 개입 등 몇가지 수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경제적 개입민주당정권이 처해 있던 구조적인 상황은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이후 전후 경제복구기로서 미국원조에의 의존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간주됨에 따라 미국의 영향이 그 어느때보다도 컸던 시기이다.그러나 1950년대를 통해 원조에 기반하여 수년 간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경제는 1957년을 고비로 위기에 봉착하였는데,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원인에 디인한다. 첫째,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에 의한 경제적 곤경이 한미경제 관계의 재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미국원조정책의 전환은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국제경제면에서 1950년대 후반 들어 일본과 EC가 2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경제력을 회복하면서 미국은 무상원조 위주의 원조정책에서 원조량을 줄이고 유상원조로 전환시키거나 차관으로 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있다.
5.16 군사쿠데타목 차I. 머리말II. 5.16의 배경가. 군부적 요인나. 장면정권의 붕괴요인다. 미국의 개입문제III. 박정희의 경력과 평가가. 박정희의 경력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IV. 5.16의 성격가. 혁명과 쿠데타의 개념나. 5.16의 성격V. 맺음말머리말노태우를 마지막으로 이른바 TK지역의 집권이 끝나고 난 후부터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조금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지난번 의 설문조사에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간으로 백범 김구와 테레사 수녀에 이어 3위를 차지하는 결과가 여러 일간지에 소개되면서부터 거의 전국민적인 열풍으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박정희가 주도했던 5.16의 발생배경과 박정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5.16의 구체적인 성격을 규명하여 보고자 한다. 일시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던 이를 통해서 진정 박정희가 지금의 신드롬을 일으킬만한 인물인지, 아니면 박정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에 의한 판단이라기보다는 김영삼이 정권말기로 가면서 거의 지배력을 잃고 표류하는 모습에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대한 그리움에 기인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5.16의 배경군부적 요인군부의 형성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군에 뜻을 둔 많은 인사들은 저마다의 군 경력과 연고를 중심으로 군사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세력은 일본군출신의 장교들,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 그리고 중국군 출신과 광복군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할 뚜렷한 주도세력이 없었기에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되어 19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의 수효는 무려 30여 개에 달하였다.) 한용원, 『창군』 박영사 1984 p.26김정곤, 「5.16 군사 쿠데타의 발생배경과 원인」 동아대학교 1992. p12에서 재인용이러한 단체들은 1946년 1월 15일에 '남조선 국방 경비대'의 공식발족과 함께 통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김세진, 「한국군부의 성장과정과 5.16」 『1960년대』 거름 1984. p97전술한 바와 보다 지주계급의 배경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민주당 인사들의 41%가 지주자제들인데 반해, 자유당 인사들 중의 37%, 군정 인사들의 26%만이 지주의 자제들이다. 민주당 인사들의 22%가 유교를 신봉한다고 한 반면에 자유당과 군정의 참여자들은 각각 18%와 9%만이 유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또한 민주당 정권의 참여자들은 전통시대의 한국에서 하층계급의 종교로 간주되어 온 기독교나 불교를 다른 정권 참여자들보다 적게 믿고 있었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군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소홀히 했다.또한 민주당 정치인들과 군 장교들은 서로 교류가 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사회적 출신성분이나 교육배경, 출신지방, 연령, 이데올로기적 지향 등의 면에서 양측은 매우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국의 전통적 상류계급 출신이 많았다. 교육면에서도 민주당 정부에 참여한 고위관리의 58%가 해외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5.16의 군부 내적 원인5.16의 군내부적 원인으로서는 군부의 내부정화를 위한 정군운동을 들 수 있다. 정군운동은 처음 1960년 군수기지 사령관이던 박정희소장이 당시의 참모총장 송효찬중장에게 3.15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군에서 물러가라고 충고한데서 비롯되었고 8명의 8기생 중령들이 육군참모총장에게 정군 건의를 위한 연판장을 제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군부정화를 위한 5개의 조치 : ①1960년 대통령 선거를 독려하는 데 있어 자유당에 협력한 고위군장교의 처벌. ②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장교의 처벌. ③부패하고 무능한 지휘관의 제거. ④군의 정치적 중립과 파벌주의 제거. ⑤군인에 대한 처우개선.(김정곤, 앞의 논문 pp.47∼ 48)송요찬은 이 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정군파 장교들 중에서 김종필, 김형욱, 석정선 등이 예편함으로써 정군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으나 이 사건은 곧장 5.16군사 쿠데타로 이어지는 교량이 되었다. 정군운동이 진행 중이던 1960년 9월 10일 소위 '충무장 결의'라는 다수 세력을 확보했지만, 정치조직 내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장면의 민주당 내각의 지지도는 크게 약화되었고, 따라서 장내각은 신.구파간의 파벌싸움,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으로 인해 9개월간의 집권 기간 중 3회에 걸쳐 전면 개각을 단행해야만 했다.경제적 요인민주당이 명백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당정권이 집권기간동안 독자적인 정책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고 단지 대중의 압력에 순응함으로써만이 권력을 유지하려한 정책 지향을 취했다는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60년 자유당 정권 말기의 3.15 부정선거를 전후하여 그나마 취약했던 한국 경제는 다시 재정, 금융 면에 난맥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미국의 원조 철회 위협이 갖는 영향을 목격한 바 있는 민주당 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미국의 비위를 충실하게 맞추어서 미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민주당 정권은 미국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줄곧 거부해 온 환율 변경과 원조자금 지출에 대한 미국의 감독이라는 미국의 압력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원조의 모든 배당과 지출을 미국이 감독.검사하게 되자 원조 달러를 배분 받은 기업가들의 집권당에 대한 정치자금 상납이 불가능하게 되자, 사치품이라는 이유로 금지해온 일본 상품의 수입을 허가했고 기업은 일본상품 수입면허 획득에 대한 대가로 정부에 정치 자금을 상납하는 식의 정치자금 조달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침체해 있던 경제 상황과 맞물려 경제 재난을 촉진시켰다(환율 변경 2개월후 15% 물가 상승, 인구증가율 2.9%에도 못 미치는 경제 성장률실업률 23.7%,생산량 9.8% 감소)) 김정곤, 『5.16 군부 쿠데타의 발생배경과 원인』 동아대학교 1992.. 그리고 민주당 정권의 국가예산에서 원조 자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52%나 되었으며, 이 사실은 당시 한국경제가 사실상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생각까지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여론의 요구에 의해서 채택된 '경제개발제일주의' 정책도 5.16 쿠데타 정부수립 후에 한국의 국내외적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반공이데올로기는 점차 본래의 이념적 역할인 동의체제를 상실하고 동원과 억압이라는 정치적 기능으로만 나타나게 되었다.) 유재일, 「한국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정착」 같은책이러한 동원과 억압의 정치적 기능강화는 종종 군부의 정치개입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콜론보고서'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60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상계」지에 분할 게재되었는데, 당시 군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보고서는 가난한 국가의 유능한 자제가 대학에 들어가는 수가 학자금 부족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의 기회는 보통 군부학교를 통해서 충족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하층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장교가 다수 생기며, 이들은 특권적 관리정치가에게 분노를 갖는데 이것이 폭발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은근히 군부의 정치개입을 부추기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콜론 어소시에이츠 보고서」 『사상계』 1960년 1월호여현덕, 앞의 글에서 재인용미국정부의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공세는 군부가 정치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통로구실을 하였다. 그 한 예로서 미국은 4월혁명 이후 과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정권하의 부정축재자 처단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들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피하도록 시사한 공문을 당시 허정 국무총리와 장면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장면에게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과정(過程)의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고환원, 조세사범에 대한 벌과금 및 추징금의 강력한 징수, 그리고 원조자금에 의하여 도입된 원재료독점기업에 대한 처단이 한국기업의 생산위축을 초래하고 따라서 급격한 인플레를 재연시킬 우려가 있음에 비추어 이 공한은 한국의 4월민주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며 비민주적 이승만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었고 미국이 그간 7,8년간에 걸친 본격적인, 막대한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원조가 유효하게 사용관리되었던가 아니되었던가 간에는 의견들은 보통은 경제분야에서 이룩한 일련의 업적과 관련하여 우리나라를 후진국이라는 입장에서 개발도상국의 위치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길을 열기 위한 노력했던 모습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한 비판의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식의 산업화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산업화도 가능했을 것이고, 일련의 경제발전의 성과의 공을 일개 개인의 정치 지도자에게 모두 환원시킨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현장에서 노력했던 노동자야말로 경제발전의 최대 공로자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민족주의자라는 의견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남한의 발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북한을 포용하여 민족 전체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는 원대한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박정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이 정치적 리더십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박정희의 카리스마적인 정치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도 박정희의 리더십에 숨어 있는 아집과 독선이라 주장한다.5.16의 성격혁명과 쿠데타의 개념) 김영국 외, 『정치학개론』 박영사 1980 pp287∼289안희수 외, 『정치학』 대왕사 1993 pp677∼680김호진, 「군부 쿠데타 이론 : 집정관체제론」 『한국정치체제론』 박영사 1990 pp88∼104정치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변동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다. 근대화와 정치발전은 각각 사회체계와 정치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변동의 대표적 양상이다. 그리고 이 두 변화의 양식은 사회 및 정치체계가 당면한 역기능 현상을 해소시키기 위해 서서히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원칙에 따라서 그 사회구조, 지배관계와 권력의 성격, 법과 제도 등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므로 정상적 변동이라 할 수 있다.혁명은 이러한 형태의 변화와는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혁명은 대개 사회 및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