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사회의 '이에'적(혹은 가족적) 구성 원리의 형성 과정과 변천家의 형성은 중세 11C∼12C에서 시작된다. 한정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직업을 부여하였는데 이를 家職이라 했다. 그리고 후에 家業으로 변칭 되었다. 이는 家의 실체화 혹은 맹아의 단계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兵農 분리를 시행하면서 농촌 지역에서의 상행위를 금지시켰다. 이는 도시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또한 太閤檢地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石高制라 하여 행정구역을 鄕(장원)에서 村(무라)로 재편하였다. 또한 城下町이라 하여 도시를 만들었는데 중앙에 영주의 주거지인 천수각, 町으로 구분되었는데, 町은 업종별, 기능별로 나누어졌다.-도시의 배후지는 농촌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시와 농촌을 행정적으로 구분해 놓은 다음 농촌에서 도시로 혹은 도시 내 구역 간의 이주를 금지시켰다. 이로써 직업은 곧 주거를 그리고 신분을 결정짓게 된다. 여기서 일본 家의 특성이 파생되어 나오는데 家의 유지는 家名과 家業이 유지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집안을 이어감에 있어 혈통을 중시하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家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고, 위의 두 가지를 이을 사람만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혈연자의 포함 가능성이 생긴다.村의 구성은 株체제인데 여기서 株는 家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구체적 단위라고 볼 수 있다. 村내에는 10 개 내외의 株로 구성되어있고, 각 株는 本百姓과 水呑百姓으로 구성되어있다. 本百姓과 水呑百姓는 종속관계다. 그리고 각 株에는 家主가 있고 이들에게 중대한 가사에 대한 동의를 할 권리가 주어진다.메이지 유신 시기 이러한 株체제가 붕괴되면서 家적 구성도 바뀌게 되는데 四民平等主義에 따라 水呑百姓에게도 가 구성의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株와 동일시되던 家는 "戶=家=氏"이라는 도식에 따라 정의되게 된다.더 나아가서는 모든 家는 天皇家의 分家라는 체계화가 이루어진다. 이는 萬世一系 사상으로 天皇과 국민 사이의 관계를 철저한 주종관계로 묶어둠으로써 후에 군국주의적이 요소로 인식되기도 한다.이처럼 일본 근세의 농민사회는 家를 구성단위로 하여 구성되고, 그것이 상위집단인 村에 긴밀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村을 떠나서는 家는 존재하지 않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하에서의 사회관계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기 이전에 家와 家의 관계였다. 그리고 영주와 本百成과의 신분관계나 지배관계도 家적 주종관계로 존재하였다. 또한 本百姓과 종속농민과의 신분관계도 가내적 관계이며, 특히 本百姓과 비친족의 종속농민과의 관계는 가내에 있어서의 주종적 관계였다.일본의 근세사회는 신분제에 의해 분단되어 있었으면서도 각각의 신분사회는 항상 家를 단위로 구성되고, 家는 상위집단이 村이나 町에 긴밀히 조직화되었으며, 영주의 지배기구의 하부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家臣들의 家도 상위권력이 大名의 家 안에 조직화되었다. 주종관계도 인격적 관계라기보다는 家적 주종관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일본의 근세사회의 구조적 특질을 '家적 구성'이라 규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2. 일본의 국학 이데올로기와 cultural nationalism의 관계일본은 명치시대부터 패전 전까지의 근대기간 동안 가장 강력한 천황제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에도시대 때부터 이미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마련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학문적 바탕이 바로 '국학'인데, 이것은 학문으로서의 측면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맥락으로서의 운동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천황제의 강화와 일본 정신을 고양하여 'cultural nationalism'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진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국학이라는 명칭은 20세기 명치 시대에 명명되었으나, 그 계보는 18세기부터 존재하였다. 막부시대 말기의 국제정세와 국내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국학은 하나의 '국론'으로서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국학은 18세기 本居宣長에 의해서 사상·학문으로서 집대성되었는데 그는 일본인의 본질적인 가치로서 '사물의 비애'라는 정신을 강조하면서 사람의 좋고 나쁨의 기준은 '사물의 비애'를 해독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일본 고래의 정신 강조는 그의 문하생들로 하여금 신도를 중시하게 하였고 후에 신도의 국교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다시 柳田國男의 신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일본민속학의 민간신앙중시 자세로 계승된다.이에 18세기 각 番들은 番校를 설립하기에 이르고, 番校에서 육성된 문하생들은 지배계급을 형성하였으며 地誌의 편찬을 통해 유학을 압도하였다. 당시에는 양학, 즉 난학이 집중 육성되고 있었는데, 이와 더불어 平田의 문하생을 필두로 한 지방의 실천가들에 의한 국학의 보급이 농학방면에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다.명치시대 이후 국가교육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양학과 함께 국학은 널리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국학이라는 용어는 이미 그 자체에서 국가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데 명치시대에는 宣長의 취지와는 다른 맥락에서 국학에 대한 재구성이 시도되었다. 국학은 당시 밀려들어오고 있던 서양의 근대기술, 문물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한편에서의 일본인의 정신적 우위성을 지키기 위한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명치시대 국학의 산하에 있던 국사 연구는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중시하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러한 중앙사관을 통해 중앙집권화가 진전되었다. 종교계에서는 신도의 국교화 움직임이 진행되었고, '국가신도'로 진척되어 갔다. 신도는 천황의 신화적 왕권의 정통성, 신민 관계에 의한 국가 통합을 국시로 하는 황국사관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이러한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교육연구도 수행되어 국학원대학이 개설되어 이후 국학이라는 명목 하에 국사, 국어학, 국문학, 신도학의 교육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20세기에 접어들어 국학은 '일본민속학'으로 발전한다. 柳田國男은 자신이 주창하는 향토연구에 대해서 '新국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민속학을 새로운 국학운동으로 진전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민간 신앙과 소리를 중시하여, 일본고유의 영혼의 존재양태에 주목하였다.그러나 이후의 민속학은 전후 국가적 요청 뿐 아니라 일체의 현실적인 사회적 요청을 기피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일본민속학은 에도시대 이래 이어져 온 국학이 가지는 정치·사회적 맥락에서의 측면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결국 국학은 에도 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명치 유신 이후 서양의 발달된 근대화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본 정신의 고양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으로서의 운동의 성격을 띠는 학문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番校를 통한 지방으로의 확산, 신도의 국교화와 교육연구를 통해 일본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바탕으로 작용해온 것이다.3. 천황제 국가 일본을 지탱해 온 3요소 ; 호적, 학교, 신사○호적; 메이지 유신 때 株체제가 붕괴된다. 四民平等主義가 적용되어(단 왕족 제외) 本百姓에 종속되어있던 水呑百姓도 家 구성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村 아래의 '가족'까지 통치 의 단위가 된다. 에도(江戶)시대까지만 해도 국가 권력은 村·町 까지만 영향력을 미쳤고, 그 이하 개인들은 村·町 내에서 자치적으로 통제를 했었다. 이때 村을 이루던 기본 단위는 株였는데(10株/村) 이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간단하게 도식화하자면 예전에는 '戶=株'였던 것이 '戶=家'로 변화한 것이다. 이로써 1868년 '家제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戶=家=氏. 여기서 戶를 기록화 한 것이 戶籍이다. 호적제도는 전 국민을 일률적으로 호주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관계(친족관계)에 따라 존속, 직계, 남성을 우위로 하고, 비속, 방계, 여성을 그 밑에 두는 가족 질서를 갖는 친족 집단으로 파악하여 통치 체제의 기초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호적제도에는 가부장적이었는데 호주는 가족의 거소 지정권, 혼인, 양자에 대한 동의권 등 가사 결정권을 갖는 반면 가족의 불복정이나 이의 제기는 인정되지 않았다. 가족의 長은 아버지였고, 가족들은 그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당연시했다. 여기서 나아가면 천황은 곧 아버지였기 때문에 천황에 대한 충성은 자연히 강조되었다. 이렇듯 호족제도는 가족, 촌락 공동체, 국가를 강력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근대 일본에서 천황제 국가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Ⅰ.서론"살아 지난 여기까지 와졌주."(살아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지)"게메, 그땐 어떵 살아신지 모르커라."(글세, 그때는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4.3항쟁 49주기 합동 위령제의 제단을 바라보며 70대 두 할망이 무심코 내뱉은 넋두리다.4.3 항쟁과 뒤이은 대학살. 어린이·노약자·부녀자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군인·경찰·서북청년에 의해 죽창·총·칼에 찔려 죽고, 총·몽둥이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고, 땅에 파묻혀 죽고, 바위에 떨어져 죽고, 나무에 매달려 죽고, 바다에 던져져 죽고, 굶어 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고, 이렇게 죽고 죽고 했다. 이때 죽은 이가 제주도 인구 28만 중 3만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통한의 숫자다.제주 4.3 민중 항쟁은 민족 운동과 제국주의, 통일과 분단의 미군 점령기의 본질적 대립 축이 빚어낸 가장 거대한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이며 한국전쟁을 제외하고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조사하고 답변해야 할 당국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지난 40년간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분단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4.3민중 항쟁에 접근함으로써 그것은 '폭동'과 '반란'으로 규정하고 있다. 진정 제주 4.3 항쟁은 폭동이고 반란이었는가. 아직까지 사실조차 확인되고 있지 않으며 그 결과 항쟁의 성격이 왜곡되어 왔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재인식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Ⅱ.본론1. 해방 후의 제주도1) 8.15 해방 ∼ 1947년 3.1 시위1945년 8.15 해방 이후 제주도민들은 자치적인 치안조직 및 행정·경제조직이 결성되었다.이를 시작으로 9월 10일에 이르러는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되었다.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작으로 각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마침내 건준의 발전적 해체로 9족 현상이었다. 갑작스런 귀환동포의 증가가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한 투기군들과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이에 미군정에서는 미곡소매의 최고가격을 정해서 미곡유통을 통제했고, 도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농촌지역의 쌀을 강제로 수집하는 방침을 각 시 . 군에 시달했다. 이른바 '미곡수집령'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에서 의도했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즉, 도시에서는 식량의 부족 사태를 초래했으며, 농촌에서는 시세보다 2∼5배의 훨씬 낮은 가격에 강제로 공출 당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도시민과 농민 모두의 원성을 사게 된 것이다.은 도민의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갔다. 이와 더불어 밀무역을 둘러싸고 모리배와 결탁한 단속기관의 부정부패는 도민들의 입에서 한탄의 소리가 나오게 했다.2) 1947년 3·1 기념시위 ∼1947년 4.3 항쟁1947의 해방공간은 미군정과 민중이 본격적으로 갈등을 일으켜 대립하는 시기이다. 전국적으로 10월 항쟁의 여파를 이용하여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구체적인 단독정부의 구상을 조직적으로 추진해나간다.제주도에서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격렬한 충돌은 47년 3월 1일의 3.1절 기념시위에서 미군정의 공격(발포)으로 시작된다.) 박명림, 앞의 글, 58쪽.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백산서당, 1990, 159쪽. 도군정청은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지지', 3.1절기념만세' 등의 구호) 제주 4.3연구소 엮음, 앞의 책, 161-163쪽.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제주도민(3만명)을 향하여 발포, 6명을 사망케하고 여러명을 부상시켰다.)동아일보, 47.3.4. 아라리연구원, 제주민중항쟁 Ⅲ', 소나무, 1989, 77쪽에서 재인용. 이하 항쟁 Ⅲ'이라 한다.미군정은 목포에서 100명의 응원경찰을 지원받아 체포와 구금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민중세력은 민전)민전은 이 사건을 규명하기 위하여 吳英외 4인을 파견하였으나 제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의 글에 나타나 있다. 류상영, 해방 이후 좌.우익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96-99쪽.등이 좌익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마을을 수색하고 금품을 탈취해 갔다. 특히 서청은 테러를 자행하고 금품을 강요하였다. 제주도에서의 서청은 서청이라면 우는 아이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일 정도)김석범, 이호철.김석희 공역, 화산도' 제 1권, 실천문학사, 1988, 23쪽.로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본토에서 추가로 파견된 대동청년단의 테러행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의 서청에 대한 분노와 적의가 엄청났음을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말이 안됩주. 성명 쓸 때 오얏 리(李)자를 두 이(二)자로 쓸 정도니까 ... 징그럽고 억울허영, 그놈들 쫑까질 허는 생각을 허문 모여앉앙 우리끼리 막 울기도 허고 ... 호끔 뭐 허민 총대가리로 가락가락 박아불고 ... 조끔 잘못허민 죽여불켄허고 ... 낮엔 경허민 일허래 가고, 밤이 되믄 대창 들렁 보초서고 ... .") 제주 4.3연구소 편, 이제사 말햄수다', 한울, 1989, 148쪽.서북청년단은 경찰보다도 경찰력을 더 행사하는 테러와 만행의 집합체였다.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미군정의 탄압과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라산의 중산간 지역으로 은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테러위협에 하산할 수가 없었다. 8월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으로 탄압에 대항하여 반미투쟁의 구호를 내걸었다. 뒤이어 미곡수집반대투쟁과 도군정청 관리의 남로당 입당, 극우도지사 유해진의 암살계획 등이 이루어진다. 남로당 제주도당부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들 중심에서 보다 젊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군사경험이 많은 인물들로 대체되었다.)박명림, 앞의 글, 72-73쪽. 이 조직 개편에서 군사부가 새로이 설치되었다. 군사부는 총사령관의 관장하에 지역사정과 교통등을 고려하여 3개 지대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각 지대는 총대장과 총사령관의 관장하에 군사부 지역책들이 각 지역별로 작전을 수행하였다(고창훈, 같은 글, 280-281쪽). 이러한 준비는 중경찰지서 중 10개를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주경찰서 관내의 화북, 조천, 함덕, 외도, 애월, 신엄, 삼양지서, 서귀포경찰서 관내의 남원, 성산지서, 대정 경찰서 관내의 대정지서 등이 공격을 받았다. 서청과 우익인사의 집들도 공격을 받아 우익인사 6명이 사망, 19명이 부상당하였다.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집을 선별하여 기습공격을 하고 아래와 같은 두 가지 호소문을 배포하였다.친애하는 경찰관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 당시늘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 어서 빨리 인민들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시민.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 당신의 아들, 딸, 동생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읍니다. 매국 간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읍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를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읍니다.) 김봉현, 김민주 편, 앞의 책, 84-85쪽.이 호소문의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생존권 보전 차원의 저항의식, 단선단정의 저지와 통일독립을 항쟁의 목표로 삼고, 둘째, 투쟁의 대상을 미군정과 이에 순응적인 세력으로 한정하고, 셋째, 항쟁의 전선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섭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4.3자주항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민족해방운동, 통일운동, 민중항쟁) 고창훈, 앞의 글, 275쪽. 박명림, 앞의 글, 88쪽.으로서의 4.3항쟁의 성격을 담고 있다.이렇게 시작된 제주 4.3 항쟁은 1957년 4월2일 마지막 빨치산인 오인권이 생포될 때까지 만 9년에 걸쳐 3만~4만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사실상 결렬되었다.5.10 단선반대투쟁은 선거일이 임박해 갈수록 강해졌다. 5월 8일 부터는 각면의 공공기관에 대한 습격과 봉화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5월 9일에는 조천면, 중문, 함덕, 대정 등지에서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고 투표함을 배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는 제주읍내 투표장인 투표소를 기습하여 선거인 명부, 투표함 등을 소각시켰다.투표 결과는 투표자가 45,882명으로 투표율이 선거등록자의 52%, 전유권자의 35%에 불과하여 5월 24일 북제주군 2개 선거구는 선거 무효화되고 6월 23일로 연기된 재선거 역시 유격대의 강력한 무장투쟁과 도민들의 거부로 치러지지 못하게 되어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단선을 저지한 지역이 되었다.5.10 단선이 저지되자 미군정은 담화를 통하여 강력한 토벌의지를 밝히고, 이와 함께 수원에서 창설된 제 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는 한편 경찰특수부대 및 서청단원을 증파하는 등 계속적으로 물리력을 증가시켰다.단선이 파탄되면서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경찰에서 경비대로 넘어가는데 5월 12일부터 강력한 토벌작전이 펼쳐져서 6월 중순까지 포로가 6,000명에 이르고, 유격대는 공세를 늦추고 토벌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8월 중순이후 인민유격대는 북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8.25 지하선거에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유격대와 마을자위대는 여러 마을을 찾아다니며 연판장 운동을 전개하여 3개의 선거구에서 선거를 실시하였고,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이 제주도 대의원으로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을 위해 해주로 떠났다.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군경을 통합 지휘하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최대의 토벌이 있을 것임'이 발표되었다. 10월 8일에는 도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0월 17일 중 산간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이 시기 초토화작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