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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어독문]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와 슈트롬 운트 드랑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1774)1. 슈트름 운트 드랑(Strum und Drang) 과 괴테1770년대 이전의 독일 문학은 계몽주의(Aufklarung)가 지배적이었다. 계몽주의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독일로 이전된 것으로, 인간의 이성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문학 내에서도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양식보다는 이성적이며 서사적인 양식을 위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계몽주의 아래에서 문학의 다양한 기능 즉 인간을 감동시키며 인간감정의 근원을 찾는 행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무미건조한 형식과 외면적 도덕률을 타파하기 위해 독일에서는 괴테와 쉴러를 위시한 ‘슈트름 운트 드랑’) 시대를 열리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괴테는 쉴러보다 앞서 이 시대를 개척하게 된다.이러한 슈트름 운트 드랑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사회적, 예술적 전통에 대한 반항이라든지 자연으로 향하는 불붙는 정열, 모든 문학의 형식과 법칙을 벗어나려는 분방한 태도가 이 시기 괴테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괴테는 특히 희곡을 구성하는데 기존에 레씽 Lessing이 만들어 놓은 계몽중심의 극과는 사뭇 다르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극 형식을 벗어나야만 했다.2. 「프로메테우스」이 송가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화해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나' 프로메테우스는 독일문학에서 기존의 규범을 부정하고 천재성을 중시한 18세기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시기의 이상적 인간상을 대변한다.PrometheusBedecke deinen Himmel, Zeus,Mit Wolkendunst!Und ube, den Knaben gleich,Der Diesteln kopft,An Eichen dich und Bergeshohn!Musst mir meine ErdeDoch lassen stehn,Und meine Hutte,Die du nicht ,Um dessen GlutDu mich beneidest.프로메테우스당신 하늘을 가리시오, 제우스여,자욱한 구름으로!엉겅퀴 목 자르는 아이처럼힘이나 자랑하시오,참나무와 산봉우리에!하지만 내 대지는건드리지 마시오.내 오두막도 아니 되오,당신이 짓지 않았으니.내 아궁이도 아니 되오,그 불길이 탐나서나를 비록 시기해도.Ich kenne nichts Armer'sUnter der Sonn' als euch Gotter.Ihr nahret kummerlichVon OpfersteuernUnd GebetshauchEure MajestatUnd darbtet, warenNicht Kinder und BettlerHoffnungsvolle Toren.태양 아래 그 무엇이너희보다 가련할까, 신들이여.초라하기 그지없이제물이나 받아먹고기도 입김 마시고위엄을 뽐내다가굶주려서 죽겠지, 만약어린애나 거지같이희망에 찬 바보들이 없다면.Da ich ein Kind war,Nicht wusste, wo aus, wo einKehrte mein verirrtes Aug'Zur Sonne, als wenn druber war'Ein Ohr, zu horen meine Klage,Ein Herz wie meins,Sich des Bedrangten zu erbarmen.Wer half mir widerDer Titanen Ubermut?Wer rettete vom Tode mich,Von Sklaverei?Hast du's nicht alles selbst vollendet,Heilig gluhend Herz?Und gluhtest, jung und gut,Betrogen, RettungsdankDem Schlafenden dadroben?내 어린 시절에는철없고 몽매하여,길 잃은 눈을 들어하늘을 향했지, 행여 저 위에귀가 있어 탄식소리 들어줄까,나를 닮은 마음 있어억눌린 자 불쌍히 여길까 하여.허나 누가 날 도와 맞섰던가,거인족의 오만에?누가 날 구했던가, 죽음에서,노예의 사슬에서?홀로 다 이?그대 젊고 착하여 불태웠던가,속아서, 구원의 감사를,저 위에서 잠자는 자에게?Ich dich ehren? Wofur?Hast du die Schmerzen gelindertJe des Beladenen?Hast du die Tranen gestilletJe des Geangsteten?Hat nicht mich zum Manne geschmiedet,Die allmachtige ZeitUnd das ewige Schicksal,Meine Herrn und deine?Wahntest du etwa,Ich sollte das Leben hassen,In Wusten fliehn,Weil nicht alle Knabenmorgen-Blutentraume reiften?당신을 존경하라고? 무엇 때문에?짐 진 자 고통을 단 한 번덜어 준 일 있으시오?눈물 씻어 위로해 보았소,불안에 떠는 이를?나를 길러 사나이로 만든 것은전능한 시간과영원한 운명이니, 이들이내 주인, 당신 주인이 아니던가?망상했던가, 당신은내가 삶을 미워하여황야 찾아 도망치리라고?소년의 아침 꽃꿈들이모두 익지는 않았다 하여?Hier sitz' ich, forme MenschenNach meinem Bilde,Ein Geschlecht, das mir gleich sei,Zu leiden, weinen,Genießen und zu freuen sich,Und dein nicht zu achten,Wie ich.나 여기 앉아 인간을 빚노라,내 모습 따라서,나를 닮을 족속을.괴로워하고, 슬퍼 울고,즐기고 또 기뻐하고,당신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나 같은 이들을.3. 작품 개요3-1. 소제의 변용프로메테우스는 이아페토스와 테미스 또는 오케아노스의 딸 즐뤼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족의 자손이자 반신(半神)으로서, 판도라의 남편 에피메테우스 및 지구를 어깨에 걸머진 거인 아틀라스와 형제간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진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한 뒤 그 몸에 영혼을 불어넣었고, 제우스(Zeus)가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이기도게 반항하려 했다. 그 벌로 제우스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자, 프로메테우스는 그것을 올림포스에서 (또는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훔쳐내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또한 온갖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 인간을 야만적인 생활에서 해방시켰다.프로메테우스는 또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을 인간과 신들이 분배할 때, 제우스로 하여금 기름조각과 뼈를 고르도록 속이고 살코기는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남겨 두게 했다. 이에 보복하려고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으로 판도라(Pandora: ‘온갖 선물들')라는 여인을 빚게 했다. 그녀에게 아테네 여신이 생명을 불어넣고 다른 신들도 온갖 매력을 선물했으나, 헤르메스는 아부와 책략을 가르쳐 주었다. 이 여인은 위험한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 영리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미리 생각하는 자'란 뜻) 대신 그의 아우 에피메테우스 Epimetheus: ‘사후에 생각하는 자'란 뜻)에게 보내진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은 일체 받지 말라는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녀가 가져온 항아리(후기에는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속에 들어있던 온갖 악과 질병들이 밖으로 날아가고 희망만이 인간을 위한 위안으로 뚜껑 아래 남는다.프로메테우스는 또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어머니가 된 테티스 Thetis가 결혼하면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비밀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제우스에게 그 비밀을 털어놓기를 거절한 까닭에 코카서스(카우카소스 Kaukasos) 산의 외딴 암벽에 쇠사슬로 묶인다. (제우스가 분노한 것은 물론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벽에 매달린 그의 간을 독수리가 뜯어먹는데, 밤 동안에 간이 다시 자라나기 때문에 고통은 계속된다. 이런 고문은 오랫동안 지속되나, 훗날 헤라클레스 Herakles가 활로 독수리를 쏘아 죽여서 (또는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테티스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는 형벌에서 벗어난다. 제우스의 조언자가 된다.프로메테우스는 아티카 Attika 지방에서는 장인들의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대홍수 뒤에 인간의 조상이 된 데우칼리온Deukalion의 아버지로도 알려졌다.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인류에게 각종 문명의 이기와 기술을 가르친 공로자로서 프로메테우스를 추앙했다. ‘프로메티아’라는 축제가 매년 열렸는데, 시민들은 횃불 행진을 벌여 프로메테우스 제단에 점화하고 제사를 지냈다. 훗날에 이 축제의 대상은 불의 신이자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로 바뀌었다.1773년 여름 젊은 괴테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빌려 ?프로메테우스?라는 희곡을 쓰면서 동명의 송가를 완성했다. 헤시오드나 아이스킬로스는 그들의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었다는 점을 부각시켰으나, 괴테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괴테는 고대의 소재를 그의 문학에 이용할 때는 그 소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언제나 그의 상상에 따라 변형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원래의 신화에서와 같이 티탄 족 야페토스 apetos의 아들이 아니라 제우스신의 아들로 등장한다. 이런 이유에서 괴테의 이 작품을 ‘티탄 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소리’라는 점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괴테가 프로메테우스를 제우스신의 아들로 변형시킴으로서 이제 제우스신과 프로메테우스 사이에는 부자 갈등이라는 전통적인 구도가 도입된다. 이러한 새로운 구도의 도입은 부자 갈등을 다룬 대부분의 문학 작품들이 그러하듯 아들의 반발이 거칠어 질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우스신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바위 절벽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찢기는 고통을 받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반발도 신들과 세상을 지배하는 제우스신에게 하지 않았고 또한 할 수도 없었다. 괴테는 이러한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관계를 부자 관계로 변경하여,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항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프로메다.
    인문/어학| 2006.01.01| 3페이지| 1,000원| 조회(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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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어독문]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작품의 구성과 오스카의 북소리의 의미
    - 목 차-Ⅰ. 서론Ⅱ. 본론1.1. 작품의 구성1.1.1. 시간적 구성1.1.2. 서술 시각1.2. 북소리의 의미1.3. 귄터그라스의 독일 사회비판Ⅲ. 결론Ⅳ. 참고서적Gunter Grass의 『양철북 Die Blechtrommel』분석과 감상- 작품의 구성과 오스카의 북소리의 의미 -Ⅰ. 서론최근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역사가 갖는 실제적 의미와 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귄터그라스 Gunter Grass(1917-1995)의 양철북 Die Bleichtrommel은 과거 서독의 파시즘문제와 전쟁, 즉 1차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라스의 신랄한 묘사는 우리에게 문제제기를 해 주고 있다.양철북에서는 한 소년이라는 비현실적이고, 마치 공상과학의 한 인물상을 통해서 독일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또한 그라스는 이 소설을 통해 소시민이라는 오스카르, 소시민을 통해서 세부적 일상의 현실과 그들의 태도, 사고방식들이 마치 현미경을 들여 보듯이 보여주고 있다. 오스카르의 개인적 삶은 독일의 현실을 비추는 견본이다. 주위의 인물들 역사 마찬가지이다.본인은 이러한 취지에서 작품 양철북의 외적 내적 구성을 살펴볼 것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북의 소리에 대한 견해를 적고자 한다. 또한 마지막으로 귄터그라스가 서독의 현실, 정체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정리하고 자하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 의의를 생각하며 본 글을 마치려고 한다.Ⅱ. 본론1.1. 작품의 구성1.1.1. 시간적 구성의 문법적 구성은 과거형의 서술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가 운데 현재형도 섞여 있는 것이 발견된다. 우선 화자의 논평을 이루고 있는 곳은 현재형으로 기술된다.“모든 도적, 살인범, 방화범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들은, 여전히 강탈하고 살해하고 불을 지르는 와중에서 비교적 확실한 직업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다.” (Bl. 20)논평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화자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주고 있으 므로 전통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다음과 같이 고 소리친다. (…)”이것은 서사적 형식 속에 삽입된 시적인 표현이다. 오스카르는 여기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무미건조한” 느낌을 막기 위해서이며, 폴란드에 대한 작가의 목가적 향수를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또한 2차대전 와중에서 연합군 “기습의 전야”를 묘사할 때, 보다 현장감 있는 표현의 필요성을 느낀 작가는 거의 10페이지 (Bl. 273-283)에 걸쳐 극단적인 희곡의 형식을 사용한다.가장 빈번히 사용되며, 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는 현재형의 사용은 화자의 현재 시간차원에서 나타난다.“여기, 비누로 씻겨진 정신요양원의 철침대위에서, 브루노의 눈이 지켜보는 유리로 된 엿보는 구멍의 시야 속에서 카슈바이의 감자잎을 태우는 모닥불의 연기와 실날같은 시월의 비를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이것은 오스카르가 자신의 현 위치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나타나는 현재형이다. 과거의 서술은 빈번히 현재상황을 서술함으로써 해체되는데, 이것이 과거형으로부터 현재형으로의 교체를 야기 시킨다. 그럼으로써 귄터 그라스의 소설은 기법 상으로 현재화의 과정으로서 특징 지워진다.)소설에는 ‘극화된 화자’의 현재시점과 ‘체험하는 자아’로서의 시간차원 이라는 두 개의 시간차원이 공존하는데, 후자는 소설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 반면에 전자는 다소 암시적이어서 사건의 전후 상황의 고려 하에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화자 오스카르는 자신이 정신요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체험을 서술하고는 있지만, 서술하는 동안에도 정신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체험들을 관과 하지는 않는다. 오스카르는 완결되지 않은 체험의 과정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1.1.2 서술 시각화자는 전체적으로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교체해서 서술하고 있다.“누히는 (…) 결국 오스카에게 먹여 주었다 (…) 내가 결코 다시는 맛보지 못한 그 맛이 내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이러한 인칭의 교체는 서술시점의 중요한 특징이다. ‘나’와 ‘그’의 혼재는 상호 보완적 역할을 통해 서로를 시정하기도 르의 서술시각은 ‘아래에서 본 세계’이다. 이것은 “난쟁이 시각 또는 개구리시각” 이다. 오스카르는 카드를 하는 어른들을 “탁자 밑”이나 “벽장 속”에서 보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고, “밑에서 북을 치면서”와 같이 항상 작은 키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그러나 화자의 시각은 때에 따라 관찰대상 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기도 한다. ‘개구리시각’은 단지 소설의 전반적인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화자는 1945년 이후 경제기적시대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개구리시각’을 포기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화자는 ‘개구리 시각’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서술된 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한, 단순히 화자의 위치가 ‘아래서 올려다보는’데 착안해서 ‘개구리시각’의 관찰방법을 ‘우물 안 개구리’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오스카르가 보여주는 서술시각은 질적인 측면에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새 시각’이란 점을 간과할 수 없다.“다락방은 이따금 술에 취한 마인 씨와 이중주를 하는 외에도 멀리 까지 내다 볼 수 있 는 전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탑에 오르는 사람들 모두가 갖고 있는, 다락방에 사 는 사람들을 몽상가로 만들어 주는 거짓된 해방감을 주었다.안뜰이 오스카르에게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는 반대로, 다락방은 악셀 미시케와 그 의 부하들이 그를 그곳에서 쫓아내지 않는 한 절댈 안전한 곳이었다. (…) 다락방에서 이 미로가 잘 보였다.”다락방이란 공간은 오스카르에게 대상과의 거리와 함께 지상과는 다른 넓은 조망을 열어주었는데, 이 공간에서 내려다보는 일상세계는 혼란스럽게 뒤범벅된 그 것이었고, 내려다보는 우월한 입지에서 발생하는 시각을 즐기고 있다. 이 외에도 또 ‘새 시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먼지떨이들이 루치 렌반트의 유혹에 못 이겨 올라가게 되는 스프링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 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하늘빛의 놀라울 만큼 작은 수영장이 아득하게 보인다. 수영장에는 빨강, 노랑, 초록, 하양, 빨강, 노랑, 초록, 하양, 빨요한 것이다.나치의 대중 집회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오스카르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 때 오스카르는 연단 밑으로 들어가는데 이러한 시각은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주는 기능을 한다. 연단의 특성에 대해 오스카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연단이란 무엇인가? 연단은 누구를 위해서건 그리고 누구 앞에 만들어지건 간에 그것 은 대칭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대칭적’이란 표현은 사회적 ‘질서’를 의미한다. 여기서 오스카는 겉으로 드러나는 연단의 정면만이 아니라 뒤에서 봄으로써 ‘대칭적’ 질서 원리에 종속된 군중에게 연단의 허상을 폭로한다. 오스카르는 독자로 하여금 깃발과 팡파레로 뒤덮인 연단을 정면이 아닌 ‘뒤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여러분은 연단을 뒤에서 본 적이 있는가? 단지 한 가지만을 제안해야 한다면 모든 사 람들을 연단 앞에 모아놓기 이전에 그들에게 연단 뒤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 번 연단을 뒤쪽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제대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때부터 거기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어서, 형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연단 위에서 거행되는 마 술에 현혹되지는 않을 것이다.”오스카르는 그 이유를 ‘연단 뒤의 모습’을 본 사람은 현혹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치를 ‘마술’이란 말로 표현함으로써,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을 보여주는 관점이 드러나고 있다. 마침내 오스카르는 나치즘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는 군중들을 향해 북을 쳐댐으로써 나치의 집회를 망쳐놓는다. ‘뒤에서 보는’ 시각을 통해 연출된, 위장된 대상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1.2. 북소리의 의미양철북은 이 소설의 제목에도 등장하며 작품 전체의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오스카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이 양철북은 단순히 오스카르가 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 2의 화자’라고 불릴 정도로 의인화되기도 한다.)양철북이 동화장르에서나 중요시되던 소도구를 장편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오스카르가 3살 때 성장이 멎은 어린이 치기 시작했다. 맨 처음부터 시작했다. 나방이가 전구에다 내 출생을 북을 치듯 날개를 파득거리는 것을 북으로 쳤다. 19단으로 이루어 진 지하실 계단을 북가락에 실어 전설적인 나의 세 번째 생일날에 계단에서 추락했던 일도 북채로 두들겼다. 페스탈로찌 학교의 시간표를 북으로 불러내고 북과 함께 스톡크 탑에 올라가고, 북과 함께 정치 연설의 연단 밑에 앉고, 뱀장어와 갈매기, 그리고 성 금요일의 융단털이를 북으로 연주하고, 나의 불쌍한 어머니의 발쪽이 좁아진 관 위에 북을 치면서 앉고, 그리고 헤르베르트 트루친스키의 상처투성이인 등을 북의 교본으로 삼았다. (…)”또 다른 북의 기능은 인간의 심리를 움직여 인가들이 북에 의해 인형처럼 움직이게 하는 두 번째 마적 기능이다. ‘연단’과 ‘양파 지하술집’ 장면에서 잘 나타나는데, 오스카르의 양철북이 이러한 마적 기능들을 나타낸 이유는 성인들의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세계를 파괴하고 피가 흐르는 진실을, 벌거벗은 인간을 보여주게 함이었다.)오스카르의 고난과 북이 소모된 숫자는 거의 비례함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카르는 고통을 당할 때에 더욱 북에 집착하였다.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에는 1달 만에 북이 닳았고, 어머니와 얀의 불륜을 목격할 때에는 2주일마다 한개씩 닳았으며, 10살에서 14살까지는 1개의 양철북을 부수는데 단 1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이 시기는 오스카르가 스스로 ‘수난의 시기’라 할 정도로 대단히 파란만장한 시기였던 것이다.)처음 오스카르가 ‘오스람 전기회사 제품의 60와트 전구’ 밑에서 태어났을 때, 그는 나방이 전구 불빛으로 덤벼들어 날개를 부딪치는 것을 보았고, 그 ‘소음’이 생생히 느껴져 ‘나방이가 북을 울린다’라고 했다. 이 비유에서 볼 때, 오스카르는 나방으로, 그의 북은 그 날개로 비유될 수 있으며, 따라서 오스카의 전 존재는 도달할 수 없는 빛을 향해 죽음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부조리한 성인들 사회에 속하기를 거부하여 영원히 3살에 머문 것과 같이, 그는 또한 ‘어린아.
    인문/어학| 2006.01.01| 8페이지| 1,000원| 조회(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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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문화]분라쿠와 가부키
    *분라쿠*분라쿠란 노, 교겐, 가부키와 더불어 일본의 4대 무대 예술 중의 하나로써 쉽게 말해 성인들을 위한 인형극이다. 분라쿠는 18세기 말 오사카에서 닌교조루리를 무대에 올려 선보였던 분라쿠좌라는 극단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다유와 샤미센에 의한 기다유부시에 맞춰 인형을 조정하여 연기하는 연극으로 어른을 대상으로 한 인형극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분라쿠의 기원은 무로마치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야 교토와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완성됨으로써 전성기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분라쿠의 역사분라쿠는 음악과 인형이 긴 형성 과정을 거쳐 합쳐진 것이므로, 우선 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가락을 붙여 악기에 맞추어 낭창하는 줄거리를 가지는 음악인 조루리는 15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미센이 조루리의 악기가 된 것은 1500년경이고, 인형만을 사용하는 인형극은 그보다 훨씬 앞선 1100년경으로, 연대를 따져볼 때 이들은 각각 따로따로 시작되어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양자가 함께 되어 닌교조루리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처음에는 에도 지방에서 생겨났지만 점차 그 중심이 교토와 오사카로 이동한다. 이 지역에서 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사카 출신의 다케모토 기다유라는 인물의 영향이 컸는데 그가 다케모토좌의 기다유부시를 창시하여 점차 이전의 조루리인 고조루리를 압도해나갔기 때문이다. 이후 분라쿠는 1700년대 초반까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닌교조루리 이전의 조루리를 고조루리라고 하는데 이 고조루리는 1720년경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기다유부시만이 닌교조루리로써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하던 닌교조루리도 한 때 침체기를 겪게 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오사카의 분라쿠켄의 출현으로 다시 부흥 발전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 극장의 명칭을 분락쿠좌라고 지었다. 이 때부터 분라쿠좌가 새로운 방식의 인형극 공연으로 많은 인기를 얻자, 닌교조루리라는 이름을 대신하여 분라쿠라 하게 되었다. 분라쿠는 역사의 시력 속에서도 인형극의 전통을 잘 유지하여 왔고,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예능의 하나이자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연극장르가 될 수 있었다. 1984년에는 국립 분라쿠 극장이 설립되어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분라쿠의 구성분라쿠는 다유와 샤미센 반주에 의한 기다유 음악, 거기에 인형 등의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먼저 다유는 원칙적으로 한 사람이며, 모든 등장 인물의 언어와 동작은 물론 내면의 심리 상태 및 정경이나 분위기 묘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말로 읊어 표현한다. 수백명의 관객에게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육성으로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재능과 기술이 요구된다. 대사는 박진감이 있어야 하지만, 결코 목청만을 뽑아서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허리와 배에 힘을 준 복식호흡을 통해 배에서 소리를 내야 한다. 따라서 다유는 자신의 몸을 악기로 개조시켜 가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고 따라서 훌륭한 전문인으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이다. 보통 다유는 10세 전후에 수업을 시작하여 50세에 이르러서야 훌륭한 전문인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곧 노쇠해지게 되기 때문에 정작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10~1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다음으로 기다유부시의 샤미센은 단순한 반주만이 아니라 때로는 다유를 돕거나 리드하며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기다유부시를 만들어간다. 샤미센은 조루리의 템포와 리듬을 결정하며, 또한 그 장면의 정경이나 분위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다유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유와 샤미센이 협력자이긴 하지만 무대에서 짜 맞춘 듯한 연주는 하지 않는다. 매회 상대의 태도에 따라 즉흥적이고도 진지한, 긴장감 넘치는 연주를 해낸다. 샤미센은 무대에서 연주할 때 모두 외워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마지막으로 인형은 오모즈카이, 히다리즈카이, 아시즈카이로 이루어진 세 명의 인형 조종자가 호흡을 맞추어서 하나의 인형을 다루는 것이다. 인형은 머리, 어깨, 몸통, 팔로 이루어져 있고, 다리는 원칙적으로 남자 인형에만 있다. 중심이 되는 오모즈카이가 목, 몸통, 오른손을, 두 번째 사람인 히다리즈카이가 왼손을, 세 번째 사람인 아시즈카이가 양쪽 다리를 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인형을 세 사람의 전문가가 협력하여 조종하며 연기하는 것이다. 여자 인형에는 다리가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기모노 자락을 손끝으로 잡아 처리함으로써 다리가 있는 듯이 보이도록 한다.-분라쿠의 내용분라쿠를 내용적으로 분류해보면 크게 시대물과 세화물로 나눌 수 있다.먼저 시대물은 시대 배경이 헤이안, 가마쿠라, 무로마치 등 에도 시대 이전 것으로, 귀족이나 무사 계급의 사건을 취급한 작품을 말한다. 연출, 연기, 작곡 등 모든 면에서 세화물보다 무대나 의상도 화려하며 형식적이거나 양식화된 것이 많다. 딱딱한 윤리관이나 과도한 과정 및 기교 등이 현대인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현대 연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비스런 해방감이나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다음으로 세화물이란 에도 시대의 상공인의 생활과 풍속을 배경으로 서민의 사건, 연애, 인정의 갈등 등을 그린 작품이다. 시대물에 비해서 그 수가 적고 사실적이며 템포가 빠르다.이 외에도 게이고토라고하는 서정적이고 화려한 선율을 자랑하는 짧은 단막 작품도 있다*가부키*가부키는 일본의 전통 연극으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가부키가 가진 어원은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가부키가 탄생하던 그 당시에는 새롭고 첨단을 달리는 대중 예술로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가부키의 역사가부키의 발생은 근세 초엽, 전란에 의해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들의 혼을 위령하는 불사가 각처에서 일어나게 되고 이때 등장한 이즈모노 오쿠니라는 여성 예능인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오쿠니는 신사의 무녀 출신이었는데 신사 중건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거리에서 춤을 추었고 이 춤이 인기를 얻게 되자 각처에서 여성들의 춤이 생겨나서 이 춤을 가부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초기와는 달리 도시의 유곽 앞에 유녀들이 나와 선정적인 춤을 추며 호객 행위를 하게 되고, 이 유녀 가부키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자 막부는 풍기 문란의 이유로 이를 금지시키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성들에 의한 가부키 대신에 와카슈 가부키가 생겨났는데 와카슈란 젊은 남성을 가리키는 말로 미소년들로 하여 춤과 곡예를 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와카슈 가부키도 남색, 매춘을 겸하였기 때문에 유녀 가부키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금지된다. 그리하여 결국 성년 남자들이 선정적인 춤 대신에 연극만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공연을 허가 받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춤으로 시작된 가부키가 연극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또한 여성이 무대에 설 수 없었기 때문에 남성이 대신 여성 연기를 하는 온나가타라는 가부키의 독특한 연기술 또한 이 때부터 유래된 것이기도 하다.1716년에 들어서 가부키는 침체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를 벗어나고자 한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가부키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가부키는 닌교조루리와의 교류를 시도하였는데 닌교조루리의 뛰어난 각본성을 받아들였고 노에서도 스토리나 연출 방법등을 배워와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닌교조루리로부터 희곡 구성이나 연기 연출 상의 큰 영향을 받은 가부키는 닌교조루리가 쇠퇴한 틈을 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는 무대 기구가 발달하였는데 회전 무대나 무대 밑에서 배우를 올려 보내는 세리아게라는 장치 등이 개발되어 풍부한 연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문/어학| 2006.01.01| 3페이지| 1,000원| 조회(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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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한민족의 기원
    한민족의 기원1. 시작말구소련과 몇몇 중국의 학자들은 중국 동북지역이 원래 고아시아족이며, 대개 지금부터 6000년 전부터 퉁구스족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고학상 그 시기의 유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을 우리나라에서는 김정배와 김원룡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고고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이런 동북지역에 있어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빈약한 것에 반해 청동기 시절의 유물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특히, 길림성 서단의 서단산 문화는 예맥족이라는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이 예맥으로부터 부여족이 나왔고, 이 부여족은 다시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진다. 따라서 예맥의 문화를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2. 예맥예맥은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고예족, 맥족 계통의 총칭이다. 예맥은 예족과 맥족이 혼합한 동일 언어 습속의 민족종합체이다. 예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시어』대아, 한혁에서 나온다. 예맥은 또한 ‘위국’이라고도 한다. 즉, 예는 원래 어렵부락이고, 맥은 떠돌이사냥 또는 유목부락이다. 이 종족들이 혼합되어 예맥이 되었다. 이들은 따라서 정착하여 농업위주의 민족과 결합되어 예맥어족 또는‘어지’도 형성되었다.예와 맥의 거주지역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 영역은 많은 논란이 있지만 동북 중남부와 조선반도로 귀착된다. 즉, 동쪽으로는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유역, 북쪽으로는 눈강, 서쪽으로는 송요를 경계지역으로 본다. 종합해보면 예와 맥은 서주 때의 문헌기록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각 족계가 나란히 있을 때 예맥이라고 하고 이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 또 다른 견해는 예와 맥이 합류되었다가 분리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북쪽의 맥은 부여를 형성하고 남쪽의 맥은 고구려를 형성하고 조선의 맥족은 일부가 한족으로 편입되고 이동하지 못한 자들이 백제, 신라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단산 문화의 유적 또는 고분의 비교연구가 되었는데 표본의 차이가 커서 구체적 결론이 어렵다, 셋째, 서단산 문화는 특히 미발굴된 청동기 문화에 속해있다. 따라서 이러한 표본을 가지고 상대연대를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유적 안에서의 토기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토제용기는 서단산 고분에서 38%, 성성초 고분에서 43% 출토되었다. 고분을 단위로 출토된 부장품 중 최고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기의 기별과 변화가 풍부한 형식은 서단산 문화의 발전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성성초와 서단산 고분 출토의 호는 그 특징이 같거나 유사하다. 그러나 소달구산정대관은 산 정상에 고립되어 있으며 서단산 문화에서 성행했던 석관묘군과는 다르다. 따라서, 산정대관과 기타 고분은 소달구 고분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거 같다.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시기를 가늠해 보면 그 시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성성초> 서단산> 소달구> 소단산> 동량산> 소서산> 낭두산> 후석산, 장사산, 토성자, 양반산서단산 문화 고분군의 발전단계를 살펴보자:1기는 성성초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호의 특징은 목이 짧고 배가 원통형이다. 유형은 가로손잡이호, 수직손잡이호, 손잡이 없는 호 등이다. 서단산의 초기고분은 장방형 판석을 세워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석판을 직접 풍화 암반상에 세워서 만들었고 바닥처리는 하지 않았다.2기는 성성초 2,3조, 서단산 1조 등이 대표적이다. 1기의 호와 비교하면 목과 배 사이에 각이 커지고 짧은 목으로부터 휜 목으로 변하며, 목이 점차 길어지고 배 부분은 원통형으로부터 배부른 형으로 변한다. 가로손잡이호, 수직손잡이호, 손잡이 없는 호 등이 공존한다. 단, 수직손잡이호와 손잡이 없는 호는 수량이 감소한다. 이 시기 청동기 종류는 비파형 단검 등이 특징적이다.3기는 서단산 2,3조가 대표적이고, 가로손잡이호는 목이 짧거나 둥근 것을 거쳐 목이 긴 것으로 변한다. 대개 반월형 돌칼이 존재하며, 비석을 쌓아 만든 고분이 대표적 묘제이다.4기는 장사산, 길림시와 영길현 등이 있다.지금까지 확인된 길림지구 서단산 문화유적은 모두 112곳이다.2)서단산 문화유적의 발전서열과 분기가장 중요한 것으로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의견을 들 수 있다. 즉, 동북의 열하, 길림은 화북의 북부를 포함하여 세 석기 문화를 계승하여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였다. 무덤은 모두 돌덩이를 쌓아 축조한 석관이다. 그러나 최근 발견에 의해서 그것의 이른 시기는 서주 이전, 가장 늦은 시기는 전국시대로 제의되었다. 또한, 토성자의 층위 관계에 근거하여 그 연대의 하한은 한대 이전으로 판명되었다.그 외에도 동주신, 길림성 문물공작대, 강가홍 등의 주장도 있다. 특히 강가홍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서 결과를 참고해야 할 것을 얘기하고 있다.이러한 문화유적의 시대를 구분하면, 첫째, 전기 유적은 춘추전국시대 초기이며, 둘째, 중기 유적은 춘추전국시대 중기 이전이다. 그리고 셋째인 후기 유적은 토성자와 양둔이 대표적인 유적으로써, 춘추전국시대의 후기 이전에 해당된다.또한 이 유적들의 무덤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성성초의 무덤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이하게 발굴된 86기 무덤 중 부관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그 시기를 춘추 초기로 보고 있다. 후석산 유적은 발굴 된 10여 곳의 주거지 결구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규칙적이며 정형된 반수혈식이다. 토성자에서는 모두 26기의 석관묘를 발굴하였다. 토성자 유적도 청동기가 출토되었다.3)서단산 문화의 특징① 유물유형 : 전기의 유물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후기의 유물은 특히 토기 종류에서 비교적 복잡하다. 무기의 종류는 검, 창 등이다. 후기에는 전기에 비해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지 않았고 그 유형에 있어서도 전기와 중기에 비해 차이가 난다.주거지에 있어서도 초기의 주거지 유적은 많지 않으며, 산, 언덕이 평탄한 곳에 위치한다. 중기, 후기 역시 구릉으로부터 평온으로 발전되고 주거지 내의 배치는 부정형으로부터 기본정형으로 발전되고 돌덩이를 축조한 담벽으로부터 낮은 굴을 팠다.고토기이다.2) 서단산 문화유존서단산 문화유존은 유적 중 가장 양이 많다. 두 지역의 3,4층과 전체 주거지 유물 또한 대단히 풍부하다. 주거지 내에서 토기, 석기, 골기가 발견 되었으며, 토기가 55점 발견되었다. 이 서단산 문화는 길림 후석산, 장사산, 영길성성초, 양둔대해맹과 같은 동일한 범주이다.3) 소달구 석관묘 발굴길림시 서쪽 교외 소달구의 석관묘지는 1941년 동주신에 의해서 발견되어 2기가 발견되었다. 그 후에 많은 발굴을 통해 발굴 된 자료를 정리하던 왕아주의 지병과 사망에 따라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을 몇몇의 학자가 「소달구석관묘정리보고」로 발표되었다. 특징은, 석관의 결구가 먼저 산 언덕에 장발형의 깊지 않은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에 석관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소달구 석관묘의 연대는 서단산보다 늦고 길림 강북의 토성자보다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4) 길림구전 람기소단산, 홍기동량강 석관묘1982년 2월 길림성 박물관에서는 람기소단산, 홍기동량강 등에서 12기의 석관묘를 발견하였다. 람기소단산에서는 석기 7점과 토기 7점 등을 출토하였고, 홍기동량강에서는 고분 중에 모두 부장품이 있었으며 최소 2점에서 많은 것은 8점으로, 모두 24점 출토되었다. 특히 그 중에는 석기와 옥기를 포함한 청동기가 있다. 종합하면 동량강과 소단산 석관묘는 모두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동량강, 소단산 석관묘의 연대는 대체로 춘추전국 시대로 보고 있다.5) 소달구산정대관석관구조는 산 정상에 남북방향의 장방형 암석 구덩이를 팠다. 부장품은 상당히 풍부하여 71점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청동기는 서단산보다 늦은 시기로 전국시대 후기로 보고 있다.6) 요양이도하자1955년 이도하자촌 일대에서 마제석기와 청동기단검 토광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석관묘 고분군 한 곳을 발견하였다. 그 중 일부는 1975년에 요양시 문물 관리소에서 발굴하였다. 그 중 1호 석관묘는 인골이 발견되었고 출토유물은 청동단검 1기다. 2호는 1호묘 발굴시 발굴지구 소주산 하층문화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연대도 소주산 하층에 해당된다. 후와 하층 유형의 연대는 6000년 전이다. 후와 하층문화는 요동지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신석기 유적 중 비교적 이른 시간 문화의 일종이다. 후와 상층문화는 지금부터 5000년 전후이다.2) 심양조공가와 정가와자 유적1965년 8월에는 심양시 정가와자 유적에서 14기 청동기시대 무덤을 발굴하여 대단히 많은 유물을 얻었다.① 조공가 유적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이며, 층위는 상하 2층으로 나뉘어져 있다.② 정가와자 유적정가와자 유적은 지세가 낮고 소택지가 많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발굴에서 2기의 토광묘와 1기의 옹관묘를 발견하였으며 같은 해 심양시에서 14기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종합하면, 조공가와 양자가와의 두 유적은 규모가 크지 않고 출토 유물도 많지 않으나 그 문화성질이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문화 발전 서열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다.(4) 종합고찰청동기시대 초기인 서단산 문화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이 길림지역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유적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은 유적조사가 길림성 음마하연안조사에서 7곳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7곳 유적은 4종 문화유형으로 다루고 있는데 제 1종 문화유형은 대청취 유적, 동산두 유적, 편검성 유적이 있다. 또한 길림성 신석기 시대의 유적 교정, 음마하 연안 유적을 살펴보았다. 영가령 유적은 흑룡강성 녕안현 경박호 남단 동족 언덕에 위치하고 있고, 이 유적은 크게 상, 하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상층문화의 유물은 수제이며 무문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서단산 주거지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진다.전기는 대부분 산 정상의 평탄한 곳, 또는 산허리의 완만한 곳에 위치하며, 중기는 인공적으로 산을 깎은 다음에 축조를 한 형식이며, 후기는 수원에서 낮은 언덕이나 평원상에 축조하였다.4. 중국과 동이족과의 관계예맥족은 중국 북방의 오래된 민족으로 알려졌으며, 일찍이 황하유역의 화하, 동의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문/어학| 2005.10.07| 7페이지| 1,000원| 조회(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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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1930년대 헐리우드 시스템 평가A+최고예요
    헐리우드의 황금기라 불리는 이 시기는 또한 좁은 범위에서의 고전적 시대이기도 했다. 우선 이 시기는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영화의 제작-배급-흥행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스튜디오의 시대’ 였다. 대공황으로 인한 재정적 난관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화 산업은 무성 영화 시기의 경영자들과 제작, 기술진의 존속과 함께 안정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위대한 빅 스타들의 전성기였다는 점에서도 이 시대의 역사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험프리 보가트, 제임스 캐그니, 클라크 게이블,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마를레네 디트리히, 글타 가르보, 베티 데이비스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주인공들이었는데, 후대의 어떤 누구도 가히 이들의 매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들 스타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영화는 전설이라든가, 신화, 마술 또는 매혹과 같은 말들과 직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로 이 시대에 들어와서 헐리우드 영화의 기저를 이루는 주요 장르들(웨스턴, 갱스터, 호러, SF, 스크류볼 코미디, 여성 멜로드라마, 뮤지컬, 시대극 등)이 정착하고 발전을 이루었다.1)스튜디오 시스템영화 제작사업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초기의 영화 제작자들은 관객들의 잠재적인 요구를 조사했고, 이미 반응을 통해 드러나 있는 요구를 표준화 했다. 1915년과 1930년 사이의 스튜디오들은 영화 제작의 사실상 모든 면을 표준화 하고 이에 따라 경제적 효과를 높여갔다. 이 때문에 헐리우드의 ‘고전’시대(대개 1930년에서 1960년 까지)를 ‘공장’제작 시스템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일어난 스튜디오 시스템의 개발은 헨리 포드 등이 생산 공정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고안한 산업적인 모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영화가 계속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손에서 손을 거쳐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작진, 즉 높은 수입을 올리는 제작자, 감독, 스타뿐만 아니라 급료 체계에서 중간과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 예술 감독, 의상 디자이너, 카메라맨, 목수, 전기 기사 등 모든 사람의 공동 작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대량 유통기능을 가능하게 하였다.스튜디오 시스템은 크게 메이저 스튜디오와 마이너 스튜디오로 나누어 볼 수 있다.먼저, 1950년대 까지 메이저 스튜디오들(MGM,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RKO) 은 영화 제작뿐 아니라 직영 배급회사를 통해 자신들의 통제 아래 있던 극장에 작품을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메이저들은 일단 상품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아낌없이 투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지 쿠커George Cukor, 빅터 플레밍Victor Flemming 등 쟁쟁한 감독들과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머나 로이Myrna Loy와 같은 초특급 배우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흥행에 실패할 확률도 낮았다. 특히 그 중에서 MGM은 미국의 성공신화였다.한편, 마이너 스튜디오들은 주로 B급 영화제작에 열을 올렸는데, 점점 적은 비용으로 빨리 그것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주 메뉴는 저소득 계층을 대상으로 한 액션 영화였고, 고전작품을 각색하기도 했다. 이렇듯 마이너들이 만든 영화는 우아함이나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와 같은 영화들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면서 마이너 영화의 선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2)장르 시스템장르영화란, 익숙한 상황 설정아래 예상 가능한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친숙하고 일차원적인 캐릭터들을 그리고 있는 영화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지배하는 기간에 가장 대중적이고 흥행에 성공적이었던 영화이다. 관객들은 친숙한 내러티브 관습에 컨텍스트 안에서만 창조성과 다양성을 요구한다. 때문에 스튜디오들은 정형화 된 스토리와 테크닉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이와 더불어 사운드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장르들의 번성을 가져왔다. 사운드는 영화 연기의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는바, 무성 영화의 연극적이고 과장되며 추상적인 연기 스타일은 퇴조하고 대신 더욱 일상적이고 친밀하며 구체적인 연기 스타일이 주도적인 것이 되었다. 뮤지컬이나 갱스터, 스크류볼 코미디 같은 무성 영화 시기에는 불가능했던 종류의 영화들의 번성에 있어서 사운드는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5.10.07| 2페이지| 1,000원| 조회(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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