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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군주정과 루이14세
    절대군주정과 루이14세목차Ⅰ. 서론Ⅱ. 본론1. 절대군주정의 개념2.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성립배경3. 루이14세와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발전1) 1661년 루이14세의 친정 선포 이전2) 1662년 루이14세의 친정 선포 이후4. 루이14세와 절대군주정의 정치선전문화Ⅲ. 결론Ⅰ. 서론17세기의 프랑스는 절대군주정시대였다. 절대군주정은 군주의 권력이 무제한인 체제를 뜻한다. 이시대의 대표 인물로써 단연 우리에게 친숙한 태양왕-루이14세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정을 완성시키고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가 된 그는 어떠한 배경과 과정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과도기의 분권적 성향을 가진 귀족들을 통합하고 사회적 무질서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절대군주의 모델로 각인되었는지 살펴보고, 그를 위해 포장된 정치선전문화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절대군주정의 개념16-18세기는 유럽 사회가 봉건사회를 탈피하여 근대적인 발전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로서 유럽 근대 사회의 초기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Absolutism)란 말은 광의의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될 때는 Despotism(전제주의)이나 Tyranny(참주정)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전제 정치 일반을 지칭하고 있으며, 협의의 역사적 개념으로 사용될 때는 역사 발전상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형성된 역사적 정치체제 내지는 사회체제를 지칭한다. 절대주의체제는 대개 군주정을 채택했으므로 절대군주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절대주의 체제에서는 신분 ? 계급 제도의 유지와 같은 봉건적인 사회체제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재편성된 봉건 체제였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제도(Ancien Regime)’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봉건적인 사회 체제의 말기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절대주의라는 말은 혁명 이후에 만들어졌지만, '절대적'이라는 말은 일찍부터 사용됐다. 법학자들은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절대군주권을 이론화했다.그러나 현실적 속에서 지방적인 영역 내에서 작용하는 지배 권력인 봉건 권력으로는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므로 전국적인 경제질서에 어울리는 새로운 지배권력, 즉 전국가적인 통치권을 갖는 전제 군주 권력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3. 루이14세와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발전1) 1661년 루이14세의 친정 이전중세 말 백년전쟁(1338~1453) 이후 중앙집권화와 왕권 강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에서는 16세기 말 이후 부르봉(Bourbon)왕조(1589~1792)의 시대에 절대주의가 성립하였다.종교 개혁 시대에 위그노전쟁(1562~1598)으로 알려진 격심한 종교 동란을 겪은 프랑스에서는 부르봉공 앙리(Henri, 1589~1610)가 1589년 왕위에 올라 부르봉 왕조를 열었다.위그노였던 그는 1593년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발포하여 위그노들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30년간에 걸친 종교 동란을 종결시켰다. 앙리 4세는 쉴리(Sully, 1559~1641)를 등용하여 재정을 재건하며 농업 진흥에 힘쓰고 견직물 공업을 육성하는 등 황폐한 프랑스 경제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또한 프랑스의 발전과 안전을 위해서는 동쪽과 서쪽에서 프랑스에 위협을 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독일의 신교도들을 지원하여 황제에게 대항하게 하였다. 이처럼 앙리 4세의 의해 프랑스 절대 왕정의 기틀이 열렸다.앙리 4세가 광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된 뒤, 어린 루이13세(1610~1643)가 즉위하고 모후가 섭정을 행하자 왕권이 흔들리고 혼란의 징조가 나타났으나 1617년 루이13세가 친정을 시작한 후, 1624년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가 수석대신으로서 국정을 담당하게 되자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리슐리외는 근본적으로 부르봉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는 종교상의 목적에서 보다는 정치지 제시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표출되고 전 사회계층이 참여하고, 전사 집단인 대귀족들이 합세하면서 내전으로 발전했는데, 이를 '프롱드(Fronde) 난'(1648~1653)이라고 한다. 이로 루이14세와 마자랭은 파리에서 탈출하고 5년이나 지속된 프롱드 난은 1653년 우여곡절 끝에 마자랭에 의해 진압되고, 합스부르크왕가의 패권 다툼 또한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은의 고갈로 재정이 바닥나자 전쟁은 막을 내리고 1659년 양국 사이의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오히려 부르봉 절대 왕권 확립의 길을 터놓는 결과를 가져왔다.2) 1661년 루이14세의 친정 선포 이후1661년에 수석대신 마자랭이 사망한 후, 성년이 달한 루이 14세는 국무참사회에서 수석대신을 두지 않는 친정을 선포하였다. 이후 그는 왕다운 위엄, 예지, 체격으로써 절대 군주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프랑스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전제 군주가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주권 행사를 통해 ‘태양왕(Le Roi Soleile)' 혹은 '대군주(Grand Monarque)'로 불리워 지게 되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그의 치세는 프랑스의 ‘위대한 세기’가 되었다. 그는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핵심 그 자체였다. 자신들의 지위에 맞지 않는 야심을 한껏 품고 있는 사람들을 누르기 위해, 1661년 루이14세는 자신이 너무나도 신임하는 재무 대신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를 견제 인물로 앉혔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자신이 수석 대신 역할을 하였다. 그는 행정적으로 중앙에서는 반세기 이상 각종 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일상적 잡무까지도 직접 보살피고 직접정치를 시도하였으며 지방은 지사를 통해 중앙집권화를 기도하였다. 그는 중앙에 국방 · 재무 · 외무 · 내무 장관과 국무회의를 두고 그 아래 전문 관리를 임명하여 왕의 정책을 집행하게 했다. 국무회의는 재정회의 및 추밀회의 등과 함께 왕의 자문에 응하는 수족이었을 뿐 의결권은 없었다. 고등법원은 존속 시켰으나 왕권을 견제하던 이전과 달리 왕권에롭고 세련된 궁정 생활은 유럽 각국 군주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프랑스어는 당시 유럽 외교계와 사교계의 언어가 되었다.루이 14세는 군사력의 양성에도 힘써 17세기 후반에 프랑스는 유럽 대륙 제1의 군사대국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 군사적인 국력의 증대와 축적을 배경으로 하여 루이 14세는 영토를 팽창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전쟁(1672~1678)을 일으켰으나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 에스파니아, 프로이센의 지원하에 완강하게 저항하여 별 성과없이 전쟁을 종결시켰고, 그 후 라인 강변의 독일로 영토를 팽창하고자 아우구스부르크동맹 전쟁(1689~1697)을 일으켰으나, 거의 유럽 전체의 대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에 저항하였으므로 루이 14세는 유럽의 현상 유지에 합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년 뒤 왕위 계승자가 없던 에스파니아의 카를로스2세(1665~1700)가 그의 전 영토와 왕위를 루이14세의 손자 필립에게 물려주고 사망하자, 에스파니아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이 발생하였다. 부르봉 왕가에 의한 프랑스와 에스파니아의 통합이 유럽 국제 정치의 세력 균형을 붕괴시킬 것을 두려워한 유럽 각국은 대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대항하였고 결국, 전쟁은 유트레이트조약의 체결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에스파니아가 프랑스와 합병하지 않는 다는 조건하에 그의 손자 필립을 에스파니아의 왕으로 앉히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 대가로 신대륙의 뉴펀들랜드, 노바 스코티아, 허드슨만 지역, 그리고 지중해의 관문 지브롤터를 영국에 양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에스파니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를 획득하였고, 프로이센도 이 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왕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여전히 대국이라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일으킨 많은 전쟁으로 쇠약해지고 국가적 자원을 탕진했으며 재정 적자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절대 왕정의 모순이 증대되었으며 또한 그가 종교적 통합을 꾀한다는 이유로 1685년 낭트칙령을 철폐하였기 때문에, 유능한 기술자와 상공인이었치하며 극적 형태로 고양되었다. 현실 정치에서 그것은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했다. 프랑스에서 프롱드난과 함께 바로크 문화가 절정에 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그러나 1653년 프롱드난의 진압을 계기로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평정하면서 반란에 패한 수많은 귀족들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이러한 정치 사회적 변화는 예술 세계에도 여실히 반영되었다. 왕이 학문과 예술의 후원 사업을 독점하고 방계왕족인 데 콩데를 제외하고는 귀족들의 사적 후원은 자취를 감추었다. 콜베르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전리품으로 수거하며 예술 세계를 장악하여 새로운 원칙과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고전주의 정신을 구현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왕의 권위와 영광을 선전하는 데 있었다. 콜베르가 1663년에 소 학술원을 설립한 것은 바로 그런 목적에서였다. 이는 콜베르의 주도하에 왕의 신화를 주조해내는 공장 역할을 맡았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루이14세의 이미지는 대부분 소 학술원의 작품이다.때로는 사실과 거리가 먼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루이 14세가 과학 아카데미를 방문하여 과학 기자재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담은 판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루이 14세는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판화의 내용은 상상의 산물이다. 루이 14세는 과학에 관심이 적었고 과학에 대한 후원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드물었다. 이제 정치적 통일의 중심축인 왕의 존재가 모든 예술의 기준이 되면서 예술의 역할은 오직 절대군주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콜베르는 학문과 예술을 교회에서 학술원체제 속으로 정착시켰다. 예술 사업을 관장한 것은 국가였으며 국가 이데올로기가 고전주의 미학의 전범이 되었다. 바로크 예술은 눈부시고 장엄하게 영웅 루이14세의 승리를 표현했지만 군주정은 이 승리의 순간을 영원화 시킬 새로운 양식을 필요로 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예술에 절제와 균형, 통일성과 엄격성을 가미한 프랑스 고전주의는 바
    인문/어학| 2010.06.21| 6페이지| 1,500원| 조회(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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