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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합작운동과 남조선 과도정부
    좌우합작운동과 남조선 과도정부목차Ι.서론Ⅱ.본론1.좌우합작운동2.남조선과도정부Ⅲ.결론Ⅳ.참고문헌Ι.서론광복 직후 수많은 정치집단이 분출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때에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이를 두고 한반도 내부에서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이러한 대립 양상은 민족분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승만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남한단독정부 수립을, 김구 계열은 신탁통치 반대·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좌익계열은 신탁통치 찬성·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중도세력은 신탁통치문제 일단보류·우선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각각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 우익세력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여운형, 김규식 등이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여 이를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좌우합작운동이며 미군정이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기 위해 설치했던 집행부가 남조선과도정부이다.Ⅱ.본론1.좌우합작운동좌우합작운동 추진의 배경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등을 명시한 모스크바 의정서가 채택·발표되었다. 이러한 신탁통치안 발표 이후 국내의 정국은 소위 탁치논쟁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당시에는‘인공’과 ‘임정’의 합작 기도, ‘4당 코뮤니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인민당이 모여 발표한 것으로 그 내용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하여 해결하게 한다.”이다.’ 등이 모두 실패한 시기였기 때문에 탁치문제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은 심화되어갔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정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6년 민족주의 정당들로 구성되었던 국민운동추진단체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발족하였다.는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우익세력의 통일을 이루었다. 한편 우익과의 합작에 실패한 좌익은 그들만의 통일전선체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을 추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으며 또한 좌우합작대표를 파견할 모체를 형성하였다.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것은 '韓民族의 自主獨立運動 에 대한 自律的 方向을 再明示'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나, 한반도 문제는 자체 역량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국제적 성격을 띤 것이었기에 미소공위가 속개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속개 촉진을 위해서는 광범위한 국내세력의 결집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였고 이는 미소공위를 재개시켜 궁극적으로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국내좌우합작세력에 의해 추진되게 되었다.한편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됨으로써 남북한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의 길이 일단 막히게 되자 정계 일각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안이 나오게 되어 민족분열의 위험을 더해갔다. 그리고 이승만이 정읍발언 이승만이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일.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 안을 표면화시킴으로써 분단의 위험을 더하였다.이렇게 해방 후 한반도의 정국이 좌우대립의 심화, 미소공위의 결렬,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의한 민족분단의 위험으로 나아가게 되자 좌우세력이 타협· 합작하여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것이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좌우합작운동의 전개와 실패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위한 접촉이 시작되어 우익 측의 원세훈, 좌익 측의 허현 등과 함께 좌우합작 4자회담이 성립되었다. 뒤이어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어 덕수궁에서 1차 회담이 열렸다.이 회담에서 좌익은 좌우합작 5원칙 ①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 미소공위의 속개촉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매진하되 북조선민주주의 민족 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 통일을 기할 것.②토지개혁(무상 몰수, 무상 분배)중요 산업 국유화 ③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 ④남한의 정권동성명 발표 ③신탁문제는 임정 수립 후 해결 ④임시정부 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통선거에 의한 전국 국민회의 소집 ⑤국민 대표 회의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 정부 수립 ⑥보통선거를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 할 것. ⑦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 법령은 균등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 ⑧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 법정을 구성하여 처리을 제시하였다. 좌우에서 제시한 합작원칙 가운데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탁통치문제와, 토지 및 중요산업의 처리 등 경제정책 문제,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처리 문제 등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좌우합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기도 했다.이러한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익 측의 5원칙과 우익 측의 8원칙을 절충시킨 좌우합착 7원칙 ①모스크바 3상 결정에 의한 남북통일의 임시정부를 속히 수립 ②미소공위의 재개를 적극 추진 ③토지는 유상으로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할 것 ④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되 합작 위원회에서 이 안을 작성하여 입법기관에 회부, 검토 하여 시행 ⑤남북을 통하여 피검된 애국 정치가의 석방을 기하는 동시에 일체의 테러를 근멸할 것 ⑥입법기관의 설치 및 운영 방법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할 것 ⑦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7원칙이 신탁통치, 토지개혁, 친일파처벌 문제에서 좌우익 핵심 세력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이 정체상태에 빠졌다.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에 간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미국 국무부가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시사하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사실상 결렬되었다. 뒤이어 좌우합작위원회의 좌파 주석이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이후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감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 확정되었다.좌우합작운동의 실패문제에 관하여 쉽게 타협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힘겨루기는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이루는 방편으로 남·북 분단정권 수립을 선호할 개연성을 제공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소련은 반탁단체의 공위 참여 반대를 주장하여 이승만과 김구를 임시정부에서 배제시키려 하였고, 미국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UN에 가져갔다.둘째, 국내 정치 세력의 극단적인 이념적 분열은 좌우연합전선 형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극우의 이승만부터 극좌의 김일성과 박헌영까지 통일전선에 의한 국가 창성을 주장하였으나 이러한 좌우의 공감대는 미·소 분할점령에 의한 세력재편과 이를 통한 좌우갈등의 증폭 속에서 급격히 와해되었다.중도파는 이러한 좌우의 이념적 분할이 남북의 분할로 이어져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민족적 통합력을 확보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며 좌우의 대립은 격해지는 반면, 중도파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에는 극우와 극좌가 정국을 장악하였고 좌우의 이념적 분열은 남북의 지역적 균열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였다.셋째, 좌우합작 운동이 미국의 지원하에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중도파의 열세를 미국의 지원으로 만회하려 하였는데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한 미국의 전략은 중도파의 전략과는 상이했다. 미국이 중도파를 지원한 것은 중도파를 지원함으로써 소련과의 협상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중도좌파, 중도우파, 극우파의 정치연합을 형성함으로써 남한을 친미화 시키는 것과 동시에 남한의 공산화를 방지하며,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남한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한다는 미국의 전략은 좌우합작운동의 전개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좌우합작운동의 주체들은 극좌와 극우를 망라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민족주의적 발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좌우합작운동 지원과 개입으로 인해 극좌파는 좌우합작운동을 미국의 음모고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는 염원으로 시작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좌우합작운동에 대한 평가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추진된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했던 김규식,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광복 후 좌우익 대립의 심화 과정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중간파적 정치세력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성립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던 통일 민족국가 수립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좌우합작운동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유일한 한반도 문제 해결의 구체적 실천회담인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당시 분단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분단된 남북한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분단 극복의 움직임이었다는 측면에서 '분단시대의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좌우합작 운동이 신간회의 민족통일, 단결정신을 계승하였으며 1948년 남북연석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대책을 논의한 회담.로 이어지는 민족통일운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이 미군정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공작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좌우합작운동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3.남조선과도정부남조선과도정부 성립 배경미군정에게 신탁통치 방식은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고 한반도 정세에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은 신탁통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대안을 원하고 있었고 그 대안이 남한만이라도 미국에 우호적이고 확실한 지지기반이 있는 과도정부의 형태를 세우는 것이었다.1946년 5월 6일부터 미소공위가 무기휴회에 들어가자 독립과 통일을 열망하던 민중들은 실망이 매우 컸다. 더욱이 소련과 다르게 직접 통치를 받고 있었던 남한 민중들의 불만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은 화난 민중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군정은 민중들이 납득할 만한 한국인에게 행정권 이양을 시도했다. 그리고 남한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
    역사학| 2015.10.16| 6페이지| 3,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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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의 경제 정책
    이승만의 경제 정책*서문국가의 토대가 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경제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 현 박근혜 정권까지의 대통령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경제 부흥에 힘을 쏟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자,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부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해방 된지 딱 3년 째 되던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그가 우선적으로 실시한 정책도 경제 부흥책이었다.정부 수립 이전의 경제{일제 강점기~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자원과 물자를 빼앗아 갔고 우리 민족은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 전까지는 한반도가 통합된 경제였지만,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이 분단 되면서 경제 체제도 같이 분리되었고 이로 인해 남한은 인구 밀도가 높고 철저하게 가난한 후진 농업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①남한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고, 방직을 위주로 한 경공업 시설 밖에 없었으며 북한과 비교하여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 등의 부족②북한은 남한에 비해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 자원 및 중공업 시설.이렇게 남, 북한의 생산력 차이는 일제 강점기에 남한에서는 식량과 면직 제품을, 북한 지역에서는 공업을 위주로 한 군수 자원을 얻으려는 병참기지화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광복 이후에는 남한으로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군정이 모든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군은 남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실로 갑작스레 해방을 맞이한 남한은 이로 인해 나라를 운영할 자금은 물론 제도조차 갖추지 못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미국의 제도뿐만 아니라 자금을 끌어다 써야 했다. 광복과 함께 분단이 되어 자본 시설도 거의 없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과 남북의 단일 정권 수립이 실패하자 어떻게든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구축을 공고히 하려 하였다. 이 .일단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남한은 미국에서 보내오는 구호 물자에 의지하여 버텨야 했다. 처음에 미군정은 물자를 너무 이른 시장 경제에 맡기다가 다시 배급제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제대로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려 암시장으로 흘러 드는 경우도 생겨났다. 미군정은 이를 막기 위해 교회 같은 종교시설에 배급을 위임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일본과의 밀무역, 남북간의 물물 교역이 성행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기도 했다.정부 수립부터 6.25 이전의 경제(1948~1950)이 시기의 경제 수준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따질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춘궁기의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전기도 발전소가 있는 북한에서 끌어다 써야 할 정도였다.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없는 정부는 제대로 된 행정도 할 수 없었다. 이 때 당시 한 정부 관료의 일화는 당시의 나라 재정이 얼마나 궁핍했는가를 뼈저리게 보여준다.국무총리실 직속 기획처 소속이었던 이선희 사무관은 주요 계획을 수립을 위해 대통령의 결제까지 받아 일본 출장 명령이 떨어졌으나 출장 전날까지 출장비가 나오지 않자, 결국 아내의 결혼 반지와 시계를 팔아서 출장비 500달러를 마련해야 했다.-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한국 경제 이야기1, p. 25-보통 이승만은 상공업 장려의 경제 활성화를 주창했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가 집권 이후 맨 처음 힘을 실은 경제 정책은 토지 개혁, 정확히는 농지 개혁이었다.해방 직후 전체 농민 중 84%는 소작농이었으며 농토의 63%가 소작지였다. 농민들의 대부분 지주들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주고 있었기에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개혁이 필요했다. 또한 당시 좌우간의 갈등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에서는 농지 문제가 가장 컸기에 국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우선적 개혁이 불가피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으로 미군정부터 시작되어 이승만 정권으로 넘어간 농지 개혁의 핵심 사항은 3,0 나눠서 현물로 상환한다는 내용이었다. 표(1)은 농지개혁 과정을 나타낸 것인데 실시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농지 개혁은 실시 도중, 전란이 터져 무산됐고, 정전 뒤 1957년에 와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표(1)-1948년대3월 22일: 미군정이 귀속농지 매각령 공포9월 13일: 조봉암 농림부 장관 취임9월 30일: 이승만이 시정연설에서 시안 공개11월 22일: 농림부가 토지개혁법 시안 공개12월 7일: 이승만이 라디오 방송에서 농지개혁 주장-1949년대1월 4~28일: 농림부가 각 도청 소재지에서 공청회 개최2월 5일: 기획처의 농지개혁안 국회송부4월 27일: 농림부가 각 시, 도에 농지개혁 지침 하달6월 20일: 정부가 농가 실태조사 착수6월 21일: 농지개혁법 개정 착수12월 21일: 농림부가 농가 실태조사 결과 발표-1950년대2월 3일: 정부가 각 시, 도에 농지소표 작성 지시3월 10일: 농지개혁법 개정 법령 공포3월 15일~24일: 농가별 분배 농지 일람표 공람3월 25일: 농지개혁법 시행령 공포4월 15일: 농지개혁 완료 발표4월 28일: 농지개혁법 시행규칙 공포5월 27일: 분배농지상환대장 작성 지시6.25전쟁과 그 이후의 경제(1950~1960)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반도는 전란에 휩싸였다. 광복이 된지 5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기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국가의 총체적 문제로 군사조직 체계의 정비는 아직 뒷전이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일선 지휘관은 군자금을 조달 받지 못하자, 대구의 한 은행에서 무기를 겨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벌어질 정도였다.3년 간의 전란이 끝나자 경제 상황은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한의 전쟁 사망자와 실종자는 90만명에 육박하였고, 이재민은 수 백만 명이나 되었으며, 물적 피해는 약 18억 달러로 공업과 발전 시설의 40% 이상, 주택의 30% 정도가 파괴조가 크게 늘었고 한미간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되어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잉여농산물의 유입되었다. 또한 면직 원료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 구호 물품의 원조도 많았다. 1961년까지 한국에 대한 원조액은 전체 31억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표(2)는 해방 이후부터 이승만 정권까지의 원조 물자를 정리한 것이다.※표(2)연료와 비료는 꾸준한 비율을 보이고 시간이 지나 시설재와 기타 원자재 등의 비율도 상승하는 점을 볼 수 있다. 여기서 PL 480은 미공법(美公法) 480호를 뜻하는데 이 때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대량 들어온다.정전 직후에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수를 두어 주도적으로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이 계속적으로 한국에 주둔함으로 국방에 들어갈 자금 상당수를 전후 회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또한 전후에 이승만은 동맹국과 미국의 원조 받아 생산 시설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1953~1961년 사이에 제조업 성장률은 연평균 11.5%를 기록했다. 제분, 옷감, 설탕의 생필품 위주의 공장들이 지어졌는데 이러한 삼백(三白) 산업의 발달로 재벌 기업의 형성이 시작되었다. 주로 미국에서 원조 받은 원료와 자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미국에서는 원조해준 달러로 일본에게 생필품을 수입하길 권고했으나, 이승만은 듣지 않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제조 시설을 확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정부의 특혜 아래에 이어서 시멘트, 유리 공장들이 이어서 준설되었다. 표(3)은 중 앞 두 가지는 외국 기관이 원조 정책으로 내놓은 경제개발계획이다. 두 계획은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당시 어떤 성격과 목표를 가지고 경제 정책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표(3)이승만은 달러의 환율 문제에 대해 미국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였는데 이는 원조 받은 달러의 환율이 높으면 달러로 돌려받는 액수가 줄기 때문이었다. 최순주 재무부 장관은 이승만에게 평가절하를 건의했다가 그 날에 경질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원조 받은 달러는 제조업 확충과 기업의 성장 외에도 전력 수급을 위해 발전소를 건립하는데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같은 해 3월 1일에 원자력 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세웠다. 또한 7월 14일 이 연구소 안에 미국에서 들여올 연구용 원자로 ‘트리카 마크Ⅱ’를 설치하기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합정의 당안리에 화력발전소 3호기를 완공시켜 석탄을 이용해 자체 전력 생산을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현재는 수명이 다하여 폐쇄되었다.1959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줄기 시작하면서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자와 환율이 올랐고, 그 동안 저이자, 저환율을 배경으로 성장하던 기업들이 대대적인 불황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가 악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정권 연장을 위해 부정 선거를 실시하다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이승만의 주요 경제 정책에 대한 평가이승만의 정책 평가에 앞서 이승만의 생애를 잠깐 보고 넘어가자면 그는 33년을 미국에서 지내며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정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관념이 확고했다. 또한 미국의 주요 인사들과의 친분도 있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배경이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밑천이 되었다.농지 개혁의 목적은 기존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작농 체제를 확립하는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분배농지에 대한 세금과 상환액이 과중하여 분배 받은 농지를 되파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농지의 농민적 소유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다시 토지 겸병과 소작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농지개혁은 보상의 부실과 인플레이션, 전란으로 인해 대지주를 제외한 중소지주를 몰락시키고 매판자본가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가구당 경지규모를 더욱 영세화시킨 불완전한 개혁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발전된 농촌 발전에 대한 계획을 내놓지도 못했다. 하지만 농지 개혁이 6.25이전에 실행이 되었으므로 농민들이 땅 문제로 월북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당초 목표했던 자작농 체제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다. 농지 개혁 당시, 있다.
    역사학| 2015.10.16| 5페이지| 3,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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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정권의 실정 평가A좋아요
    이승만 정권의 실정목차1. 자유당 조직 (1951. 12)2. 부산 정치 파동 (1952. 5)3. 국제 부락부 사건 (1952. 6)4. 발췌 개헌 (1952. 7. 4)5. 인도 뉴델리 밀회 사건 (1953. 6. 2)6. 사사오입 개헌 (1954. 11. 29)7. 진보당 사건 (1958. 1 ~ 1959. 7. 30)8. 24 정치 파동 (1958. 12. 24)9. 315 부정선거 (1960. 3. 15)10. 참고문헌1. 자유당 조직 (1951. 12)친이승만계 공화민정회와 5개 기간사회단체인 대한청년단, 국민회(1945년),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이 주축이 되어 창당, 조직되었다. 별도로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인 이범석등의 원외세력이 원외 자유당을 창당시켜 두개의 자유당이 한 지도자 아래 탄생하였다.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1951년 8월 25일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1951년 8월 31일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이 귀국하고,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자유당 창당을 맡겼다. 이것은 이범석의 탄탄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 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켰다.1951년 12월 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원외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탄생했다. 원내 자유당은 장면을 리더로 하는 일파와 장택상을 리더로 하는 일파가 존재했고, 원외 자유당은 이범석을 부당수로 선출한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의 이중적인 구조는 후에 장면의 탈당, 장택상의 탈당 등 연이은 탈당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을 평당원화 시키면서 강제로 일치시킨다.2. 부산 정치 파동 (1952. 5)1950. 5·30 선거 결과 야당이 압국 선언을 하는 회의장에 괴한이 습격하여 피습당하는 일(국제 구락부 사건)이 일어났으며,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6월 30일, 민중자결단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4. 발췌 개헌 (1952. 7. 4)이승만은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장기 집권을 위해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하였고 당시 정부의 개헌안과 국회의 개헌안이 충돌하자 양 개정안에서 발췌하여 개헌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때 개헌을 ‘발췌 개헌’이라고 한다.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4년 1차 중임허용)로, 국회 단원제를 양원제(사실상 단제로 운영, 양원 모두 직선제 민의원 4년, 참의원 6년제)로 헌법을 고치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기립 표결 등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회에 통과 시켰으며, 별다른 공고 절차 없는 가결이었다.5. 인도 뉴델리 밀회 사건 (1953. 6. 2)신익희는 1953년 5월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가 귀국했을 때 인도에서 조소앙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에 의해 공개되었다.함상훈은 민주국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성명서에 의하면 신익희가 돌아오는 중에 북한에서 온 조소앙과 뉴델리에서 비밀리에 밀회, 한국을 비공산, 비자본주의 국가로 중립화하자는 문제를 협의했다는 것이다. 민주국민당의 의원 함상훈은 그가 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조소앙을 인도 뉴델리에서 상봉하여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함상훈은 또 195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 민국당 위원장이 만났다고 주장하였다. 곧, '제3세력'이 민국당 위원장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과 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신익희와 조소앙이 뉴델리에서 만났고, 또 다. 그러나 김준연은 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김준연은 후일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김준연은 각 신문사와의 인터뷰, 정계야화 편집 시에도 자신은 억울하다며 이 말을 계속 언급한다.6. 사사오입 개헌 (1954. 11. 29)1954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여 9월 8일 국회에 제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그러나 같은 해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주(자유당 소속)는 부결을 선포했으나, 이틀 후 자유당은 이정재 감찰부 차장의 동대문 사단을 국회 방청석에 투입시켰고 사사오입의 원리를 내세워 이를 번복하였다.원래 재적의원 203명의 2/3은 135.33…명으로서 정족수의 경우 이 숫자보다 많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 올림한 숫자인 136명이 맞았다. 그러나 자유당은 당시 대한수학회 회장이었던 최윤식 교수까지 내세우며 사사오입, 즉 반올림을 하는 것이 맞는다는 해괴한 주장을 내세워 정족수를 135명으로 하여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하였다.이는 절차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헌법에 위배되는 위헌 헌법개정이었고, 이 헌법개정으로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또다시 재선을 하게 되었으며 헌법을 불법적으로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하려는 사례는 장기집권과 독재를 하기 위해 헌법을 마음대로 변개하는 취약성을 드러냈다.7. 진보당 사건 (1958. 1 ~ 1959. 7. 30)진보당은 195당이 당원을 국회에 진출시켜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기도했다"며 재판도 열리기 전에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했다. 진보당은 이에 반발해 서울고등법원에 진보당 등록취소의 행정처분취소신청을 내기도 하였으나,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서 기각되었다. 이로써 진보당은 창당 4개월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재판부는 7월 2일의 제1심에서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반공청년단을 자처하는 청년들이 법원청사에 난입하여 난동을 벌이는, 대한민국 사법사상 최초의 재판파동을 일으켰다. 9월 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열린 제2심에서는 양이섭이 자신의 진술을 번복해 자신과 조봉암의 간첩혐의는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육군특무부대의 협박과 회유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재판부는 이를 무시하고 번복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도 채택하지 않았다. 마침내 1959년 2월 7일의 최종판결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한 기소 사유인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불법소지 등을 인정하여 사형을 언도한다고 하면서도 판결문을 통해 조봉암에 대한 기소 사유의 배경이 된 진보당의 강령이나 정강정책 및 평화통일론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혀 그 판결에 대한 세간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이후 가족들과 변호인단이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고 결국 조봉암은 7월 16일에 남긴 옥중성명을 마지막으로 1959년 7월 30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의해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이 자신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진보당 사건후 52년 만에 2010년 1월 20일에 대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권고와 유족의 재심요청으로 청구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파기하는 것으로 무죄를 판결했다.8. 24 정치 파동 (1958. 12. 24)2·4 정치 파동 혹은 보안법 파동은 자유당이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되었고 이승만이 1위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59년 6월 29일 이승만- 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하였다.그러나 이승만의 다른 측근들인 이범석, 윤치영은 이기붕의 출마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로 한다.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한편, 조선민주당의 이윤영 역시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며 부통령 후보로 각각 출마하였다.민주당 에서는 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고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의석 수를 훨씬 더 얻는 등 사실상 조금씩 권력을 획득한 민주당은 이러한 자유당의 계획에 맞서기로 한다. 그러나 신구파의 갈등으로 인한 내부의 분쟁으로 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보다 5개월 늦은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통해 조병옥과 장면을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유당에 맞서게 되었다.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1조병옥48450.1%대통령 후보2장면48149.7%부통령 후보총 투표수966두 정당(자유당, 민주당)은 어떻게든 서로 이기고자 선거 운동에 몰두하였는데 상황이 1956년 때와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 2월 25일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지난 대선 때는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다). 그동안 자유당은 민주당과 대결해야만 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자유당은 이 틈을 노리게 된다. 이 틈을 노리게 된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1.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한다.2.전국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한다.3.정치 깡패를 동원한다.4.공개 투
    역사학| 2015.10.16| 8페이지| 3,000원| 조회(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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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신체제의 몰락과 12.12사태
    유신체제의 몰락과 12.12사태목 차1.유신체제의 몰락1).서론2).YH사건에서 부마항쟁까지3).10.26 사태4)결론2. 12.12사태1)12.12사태와 신군부등장2)서울의 봄 시기 민주화 과정의 전개3. 참고문헌1). 서론유신체제의 붕괴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를 정치적 반대에 의 한 도전의 증가로 체제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고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어 결국 부마항쟁이 일어나는 상황까지로 본다면, 두 번째 단계는 10.26사건, 즉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암살사건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이다2). YH사건에서 부마항쟁까지정권과 신민당과의 관계는 1976년 여름에 일어난 YH사건으로 경색되었다. 1979년 8월 YH회사라는 봉제 합섬제도업체에 근무하던 약 2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측의 페업조치로 인해 실직당한 것에 항의하여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폐업조치 철회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맹렬한 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회사주가 회사 자산을 미국으로 도피시키고 난 뒤 적자운영을 이유로 폐업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회사운영 재개를 강력히 요구했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영향을 받은 여공들은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극히 단호했으며 그들의 격앙된 감정은 위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농성노동자들과의 협상이 실패한 후 정부는 그들을 당사 밖으로 나가게 하도록 신민당에 대해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이를 거부하고 그 사태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안을 보색할 것을 정부에 대해 촉구했다. 그 과정에서 신민당과 정부와의 감정이 격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민당과 정부와의 감정이 격화되었으며 정권은 여공들을 강제해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000여 명의 경찰관이 당사에 진입하여 무차별적이고 난폭한 무력을 사용하여 노동당의원과 당원, 심지어 취재기자들까지 심한 구타를 당해 약 1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YH사건은 정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국내외 여론의 강력한 비의원들의 명단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요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에 대한 강경노선을 견지하였다. 1979년 9월 16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소수독점정권에 대한 지지를 종식시킬 것을 미국 정부에 대해 촉구하였다. 김영삼은 또한 박정희를 통제하기 위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데 대해 미국을 비판했으며 미국이 기본적으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다수 국민 사이에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영삼의 이러한 강경 반대는 이제 박정희가 용남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히 넘어섰다.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10월 8일 여당의원들은 국회에서 김영삼의 대한 징계안을 전격 처리하여 그를 국회에서 제명시켰다.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박고 있는 야당지도자의 의원직 박탈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3명의 민주통일당의원을 포함한 야당의원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여권은 사퇴서의 선별 수리 여부를 검토하였으며, 이것은 야당과 국민들을 더욱 자극했다.정치적 상황은 10월 16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영삼의 제명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그의 출신지역인 부산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반정권 봉기의 형태로 정치적 불만의 폭발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약 4000명의 부산대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된 데모는 많은 민간인들이 가담한 대규모 사두시위로 확산되었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군중들은 경찰서 경찰차 관공서 친정부성향의 신문사나 방송국 등과 같이 정권과 관련있는 상징물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시위군중은 또한 독재타도 유신헌번철폐 등과 같은 반정권 구호를 외쳤으며 공공기관에 걸려 있는 박 대통령의 사진을 찢거나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에 대한 공격은 없었으며 약탈도 목격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위양상은 부산 시민들의 불만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반정권 항거는 10월 18일 마산으로 번져서 유사한 , 그가 선택한 행위가 어떤 동기에 의해 초래된 것인지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다. 즉 우발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사전에 계획된 행위인지, 또 계획된 행위라면 그 동기가 주로 개인적 감정 차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10.26사건은 대야 전략을 둘러싸고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분열이 심화된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서 그 동기에 있어서 민주회복이라는 구국적 차원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상이한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이유에 대한 해석을 보면 첫 번째 시각은 그 암살이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개인적 적대감이 폭발해서 발생한 사건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시각이 있다. 평소 차지철의 월권행위와 오만불손한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김재규는 정보부장으로서 정국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그로 인해 개인적 입지가 약해지고 자신의 지위마저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두 번째 시각에 따르면 김재규는 개인적 연분을 버리고 한국의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김재규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이 10.26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어떤 개인적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국가민족을 위하고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생명과 민주주의와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사로서 영웅으로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재규의 그런 주장을 뒷밭침할 명백한 증거나 신빙성 있는증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세 번째 시각에 따르면 미국이 10.26사건의 배후에 있으며 특히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노력이 그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은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노력에 극력 반대한 미국이 박정희 제거를 원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박정희 제거를 원했을 만큼 긴박한 상황은으켜 박정희를 암살한 것은 일인지배체제의 특성상 유신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강제적 국가기구에 대한 박정희의 효과적 통제 때문에 집권층내의 온건파들에 의한 또는 그들과 시민사회의 연합에 의한 체제변화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 일인에게 고도로 집중된 국가 내부의 권력 구조로 인해ㅐ 정치문제에 대한 어떠한 온건책도 박정희가 반대할 경우 수용될 수 없었다, 유신정권 말기에 나타난 국가 핵심층 내 권력 관계의 중요한 변화와 함께 국가 내부구조는 더욱 경직되었다. 이것은 1974년 박종규의 뒤를 이어 대통령 경호실장은 공식적인 권한을 훨씬 뛰어 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정권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많았다. 그런데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된 후 경호실장의 위상은 더욱 비정살적으로 높아졌다. 먼저 차지철은 군부의 중요한 부분에 대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예를 들어 대통령령에 의해서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막강한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차지철은 이전에 대통령 비서실의 권한에 속했던 대통령 접견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1979년경 차지철의 허가없이는 정보주장조차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차지철은 정치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여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는 사설정보기관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수집하였으며 이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정치문제에 대한 개입의 증가와 함께 차지철은 정보부의 권한에 속하던 영역에 자연히 개입하게 되었으며 그의 강경 주장으로 인해 김재규, 김계원과의 의견 충돌이 잦게 되었다.물론 박정희의 일인지배체제하에서 차지철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을 허용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집권층 내에서의 온건론을 물리침으로써 박정희 통치체제의 유지라는 목적을 누구보다 더욱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장기집권에 집착한 박정희는 무엇보다신 말기 미국의 입장에서는 박 정권이 갈수록 위험스럽게 보였다. 박정권은 정치적 정통성을 상실하고 강압적 방법에 점점 더 의존했으며 이해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결국 4.19이후 최대의 민중봉기인 부마항쟁이 일어났으며 계엄령과 위수령 선포로 사태가 진압되긴 햇지만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국내 정세의 불안요소 외에도 군사문제에 있어서 박 정권의 미국에 대한 자주 노선 추구도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특히 핵개발을 비롯한 박 정권의 독자적 무기개발은 동북아 안정에 위협적 요소가 될 수 있었다.미국은 박정희를 갈수록 위험스럽게 행동하는 독재자로 간주하였으며, 박정희 축출 과정에서 심각한 혼란이 야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안정된 친미 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면 박정희 정권이 전복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복행위의 정치적 군사적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확실한 대안의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처형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미국이 김재규에게 암살을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된다. 미국이 박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움직였다는 중거도 찾아볼 수 없다.김재규의 행위가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보기는 어려우나 장기집권과 지나친 권위주의가 초래한 국가적 위기상황과 정치체제의 환계상황에 직면하여 그리고 그로 인해 개인적 딜레마에 직면하여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를 제거하여 유신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주요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미국의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김재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미국이 구체적으로 의도하지는 않은 것이다.4).결론유신체제의 붕괴는 10.26사건 즉 김재규 정보주장에 의한 박정희 암살에 의해 직접 초래되었다. 그리고 그 암살은 사회와 정치사회 내에서의 가중되는 반대활동의 압력과 카터 행정부의 박 정권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인한 집권층 내부의.
    역사학| 2015.10.16| 10페이지| 3,000원| 조회(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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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의 대립
    신탁통치 논쟁과 좌우의 대립목 차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우익세력의 통일전선-비상국민회의좌익세력의 통일전선-민주주의민족전선신탁통치 문제와 좌우의 갈등(1) 좌익세력과 찬탁논리(2) 우익세력과 반탁논리(3) 좌·우익세력의 대립과 갈등5. 탁치문제에 대한 논쟁6. 신탁통치 문제 이후의 정국*참고문헌모스크바 결정과 국내의 파장연합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았다. 연합국이 합의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것과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뿐이었다. 신탁통치문제는 당시 미 대통령 루즈벨트가 제안하였고, 이에 대해 스탈린이 구두 합의해준 상태였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한국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본의 가혹한 지배의 잔재를 조속히 청산하기 위하여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산업·교통·농업 등의 발전과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이다.한국에 민주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 이 위원회의 건의는 미·소·영·중 4개국 정부에게 제출되어 검토된 후 미·소 양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적 임시정부와 민주적 제 단체의 협력 아래 한국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발전시키며, 민주주의적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가로 육성시키는 데 그 사명이 있다. 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와 타협한 후 미·소·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4개국에 의한 최장 5개년간의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것이다.남한 및 북한에 관한 긴급문제의 심의를 위하여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사이에 행정·경제 분야에서 부단한 협력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을 검토하기 위하여 미·소 점령사령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2주일 내에 개최한다.이러한 합의 내용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1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운동에 민족의 단합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체제의 억압상태가 또 다시 지속된다는 두려움과 독립 국가를 즉시 달성해야 한다는 국민의 염원이 반탁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이러한 ‘반탁정국’은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기존의 반탁주장을 철회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좌우익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좌익은 신탁통치가 단순한 원조를 의미하는 후견제이며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에 따라 실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면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신탁통치를 식민지화로 판단한 우익은 찬탁을 매국행위로 간주하면서 맹렬히 반대하였다.해방을 기점으로 정치세력들간에 형성되었던 ‘애국 대 매국(친일)’이라는 대립구도는 신탁통치의 실시문제를 계기로 ‘좌익 대 우익’의 구도로 전환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구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나 과거의 친일경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을 정국에서 제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켜 자신들이 의도하는 국가를 수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이런 구도를 중심으로 양 진영은 각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제각기 통일전선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여 우익은 비상국민회의를, 그리고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좌우익 대결구도는 더욱 증폭되었다.2. 우익세력의 통일전선-비상국민회의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여론이 분분해지자, 임시정부세력은 1946년 1월 4일 비상대책을 내놓았다. 1월 21일부터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열고, 우익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곧 이어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가세하기 시작하였다.임시정부세력은 우선 우익과 좌익의 연립을 요구하면서 반탁을 중심으로 모든 정당이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와 같은 통일은 이루어 질 수 없었고, 모든 좌익정당은 이들이 소집한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제국주의적 수탈의 도구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 계급을 민족반역자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들과의 합작을 반대하였다.이런 내부적인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좌익진영은 우익진영의 정당들과 통일전선을 모색하였다. 1946년 1월 6일, 조선공산당·인민당·국민당·한민당 대표들의 비공식적인 회합이 있었고 다음날에는 정식으로 4당 간담회가 열렸다. 4당 대표들은 민족통일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민당과 국민당측이 ‘신탁통치’문제에 관한 이견을 이유로 이미 발표된 공동 성명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좌우익을 망라한 통일전선의 구축은 불가능해졌다.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좌익진영만의 통일전선체 구성에 나서게 되었고, 1946년 1월 9일, 좌익진영의 29개 단체가 서울 YMCA 강당에 모여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발기준비위원회에서는 통일 전선 결성에 관한 일체의 준비공작을 공산당과 인민당에 일임하였다.좌익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대회는 2월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선인민당·독립동맹 등 29개 정당, 사회단체와 각 지역의 사회단체가 참가하였다. 임시정부세력에서 이탈한 김원봉·김창숙 등도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적극 가담하였다. 결성대회는 좌익진영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305명의 인사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47명으로 된 집행위원회도 두었다. 중앙위원은 각 단체의 조직원 비율에 따라 선거로 선출하였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민족의 완전한 독립 달성과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시하여 긴급한 민족문제에 이르기까지 조선민족의 현 단계에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민주적 여론과 요구를 총괄적으로 대표하고 민주주의의 공동적 투쟁본부와 정부수립에 있어서 수시로 의회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의회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단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투쟁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이것으로 볼 때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자들은 여기에 영합하여, 혹은 당분간 군정기가 필요하다고 하고, 혹은 3년 후가 아니면 독립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반동분자들의 신탁통치는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다. … 통일은 저해되고 따라서 신착통치를 받는 결과에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이 신탁의 철폐를 위해서는 이 민족통일전선을 좀더 공고하게 결성하여야 할 것을 또다시 제창한다.(, 1945년 1월 1일)그런데 좌익측이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 입장을 보인 것은 1946년 1월 2일이다. 반탁일변도의 정국에서 1월 2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에서는 연합국의 업적을 인정하며, 국내 정세를 생각했을 때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나온 결과들은 적합한 결정이라고 하였다. 이 성명서가 또 다른 방향으로 정국을 진전시키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8월 15일을 계기로 한 조선 해방은 우리의 힘이 아니고 세계 미주주의 연합국의 용감한 군대의 힘으로 된 것이며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위대한 역사적 단계였다.3상회담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정권 수립과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달을 원조하여 조선의 완전 독립을 전적으로 완성하여 세계 문명국가의 지위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 진전이다.이 결정은 현하(現下)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조선 국내 정세에 비추어 조선민족의 이익을 존중하는 가장 적절한 국제적국내적 해결이며 세계의 평화 유지와 인류의 민주주의화에 최적한 결정이라고 확신하여 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① 모스크바 3상회담의 진보적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 연합국과 같이 조선의 민주주 의정부 결정의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민주주의 제국의 원조와 협력에 의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적 문명국가의 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하여 투쟁을 약속함.② 전 조선 인민 각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담의 완전한 실천을 위 구현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해방정국은 각 정파의 이합집산 주도권 쟁취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정치세력이든 당시 반탁의 분위기에 반하는 입장을 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좌익세력의 반탁에서 찬탁으로의 태도변화는 해방정국 어느 정치세력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2) 우익세력과 반탁논리우익세력은 1월 20일 김구 중심의 반탁세력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고 과도정부의 모체를 위해 민중 지도자정당사회단체해외교포단체 대표로 비상정치회의를 개최하여 비상국무회의를 설치하였다. 이 집회에서 인민당공산당 같은 좌익세력과 김원봉김성수 등 임시정부 내의 진보세력은 탈퇴하였지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해 비상국민회의라는 조직체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우익진영이 대체로 망라된 비상국민회의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제시하는 과도임시정부의 모체를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미군정의 의도로 미군정의 자문기구 성격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명칭을 달리하여 발족되었다. 이 기구는 우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될 우익진영의 통합기구로서의 위치, 그리고 일종의 입법기관의 역할을 하게 된다.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제기한 국내세력을 대표하게 될 대표 선출이 여의치 않을 경우 독자적인 남한만의 자문단체 설립을 통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국내 반탁세력들의 결집체인 민주의원이 미군정의 영향력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정국의 흐름을 미군정이 이끌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우익세력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서 남한 내 좌익세력들도 그들의 입장과 논리를 대변할 대항 조직체 결성의 필요성이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19일 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을 주축으로 하여 29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회담을 개최하였다. 2월 15일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그 성격을 일부 소수계급의 이익을 위한 전횡물이 아닌 민족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신적 공동체이며, 정부수립의 공동적다.
    역사학| 2015.10.16| 8페이지| 3,000원| 조회(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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