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리더라면 정조처럼’은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정조(正祖)야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으로도 많이 다뤄졌으니 익숙하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 코드 5049에 대해선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비밀코드와도 같은 5049의 해답은 책의 프롤로그에서 찾을 수 있었다.정조는 신궁(神弓)이라 불릴 만큼 활을 잘 쐈으나 특이하게도 항상 50발 중 49발은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은 꼭 허공에다 쐈다고 전해진다. 이를 놓고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는 자신의 문집을 통해 정조의 이러한 행동을 ‘겸양(謙讓)’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정조가 주역(周易)에 밝았음을 언급하며, 주역에 따라 마지막 화살을 ‘제왕의 산가지’라 여겼다 판단한 것이다. 즉 주역이 50괘 중 49괘로 점괘를 치듯이 정도 역시 여기에 착안해 49발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착안해 정조의 리더십을 49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저자는 49가지의 세부 항목을 크게 6가지로 나누고 있다. 저자는 책의 제1장에 ‘공부하는 군주’라는 소제목을 붙였는데, 나는 이를 ‘전문성(專門性)’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제2장 ‘시대의 변화를 읽다’는 ‘개혁적 마인드와 결단력(決斷力)’으로, 제3장 ‘인재 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는 ‘용인술(容認術)’, 제4장 ‘강건한 군주’는 ‘통솔력(統率力)’, 제5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다’와 제6장 ‘포용의 정치’는 ‘인화단결(人和團結)’로 정리하고 싶다.이처럼 정조는 군주로서 갖춰야 할 자질들을 두루 갖춘 매우 뛰어난 군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자질 중 특히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능력이 바로 ‘전문성’이었다. 내가 이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정조의 전문성이 조선의 다른 국왕과 차별화된 그만의 능력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의 국왕들은 대체로 공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조만큼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깊이를 갖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오직 세종대왕만이 그와 어깨를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정조는 단순히 학식이 뛰어난 군주가 아닌 그를 넘어 ‘군사(君師)’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기서 군사란 군주와 스승을 합친 말로 군주임과 동시에 스승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정조는 성리학의 나라이자 선비의 나라인 조선에서 내노라 하는 인재들을 모두 제치고 그 정점에 서서 그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러니 그들보다 10배, 100배 더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다른 국왕들과 달리 그가 군사를 자처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정통성(正統性) 때문이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조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강압적인 훈육과 당파 싸움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신하들은 죄인의 아들인 정조 또한 제거하려 했으나, 영조는 명민했던 손자를 끝까지 보호했다. 영조의 비호 속에서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으나, 죄인의 아들이란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왔다. 타고난 핏줄이 그의 왕권을 지켜주지 못했기에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서 왕권을 지켜야만 했다. 조선은 국왕의 학문적 능력을 여타 국가들보다 매우 중시했다. 따라서 그는 신하들보다 학문적 우위를 점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가 군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이다.그의 지식은 다독(多讀)과 정독(精讀)으로 다져졌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책을 읽을 때 미리 계획을 세우고, 반드시 이를 지키려 했다고 한다. 또한 책은 반드시 2번씩 보았는데, 첫 번째 독서가 전체적인 내용을 익히는 과정이라면 두 번째 독서 때에는 책의 내용을 심도 있게 파악하는 과정을 취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반드시 기록했다. 어느 부분이 감동적이었는지, 어느 부분이 깊이 생각해볼만한 내용인지를 기록함으로써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힘썼다. 그는 이러한 노력으로 신하들의 스승을 자처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부족했던 자신의 정통성을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이처럼 리더에게 있어 ‘전문성’이란 대단히 중요한 리더십의 요소 중 하나이다. 리더는 조직을 대표하고 이끄는 사람이며, 그의 결정에 따라 조직의 승패가 결정된다. 어떠한 문제에 대한 리더의 결단은 직무에 대한 능력, 즉 ‘전문성’에서 비롯된다. 전쟁영화를 보면 소위 계급장을 달고 신임 소대장으로 부임한 장교를 부하들이 불신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색 작전을 나가도 소대장 대신 앞 다투어 경험 많은 부소대장과 함께하길 희망한다. 왜 영화 속에서 이런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것일까? 갓 부임한 소대장보다 해당 부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임무를 수행해 온 부소대장이 직무적인 지식이나 경험 면에서 월등하기 때문이다. 부하들은 조직을 승리로 이끌어줄 리더를 선호한다. 조직의 승패가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전쟁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마음이 강할 것이다. 군 조직도 이럴진대 하물며 그조차 아우르는 일국의 국왕을 바라보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칼의 노래성웅(聖雄)이란 사전적 의미로 지덕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웅을 일컫는 말로, 쉽게 말해 성인(聖人)과 영웅(英雄)의 합성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 칭한다. 지금껏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이들은 많았다. 당장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임진왜란 때만 살펴보더라도 권율, 김시민, 곽재우, 조헌, 사명대사 등 수많은 이들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유독 이순신 장군만을 성웅이라 일컬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위인으로 칭송하는 것일까? 나는 김훈 작가가 쓴 ‘칼의 노래’를 통해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다들 알다시피 ‘칼의 노래’는 소설이다. 작가 또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책이 소설로서 읽혀지길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김훈 작가의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역사적 사실에서 기반 한 가운데 그 틀을 크게 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이러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더욱 확신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 적어도 나와 이순신은 하나 된 인물이었다. 이순신에 빙의됐다고 생각될 만큼 ‘칼의 노래’는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심적 고뇌와 갈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에서부터 시작된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던 그는 하루 아침에 죄인의 신분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책에서는 죄인의 신분으로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던 이순신 장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임금인 선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순신을 사지로 내몰던 조정 대신들의 행태를 이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전쟁으로 인해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선조는 언제나 자신의 입지를 불안해했다. 흔히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조에게 있어 ‘난세의 영웅’은 결국 왕권을 위협하는 또다른 적일 뿐이었다. 이순신에게 죄가 있다면 오로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순신의 눈에 비친 임금과 그를 따르는 조정 대신들은 ‘헛것’을 쫓는 이들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순신은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80세가 넘은 노모는 아들을 보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재촉하던 중 객사했다. 이순신은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3년상도 제대로 치룰 수 없었다. 임진왜란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힘써 키워왔던 수군은 전멸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지휘 아래 있던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한 것이었다. 비통함에 사무쳐 있을 이순신이었지만, 왕은 그리고 그 주변의 신하들은 그에게 슬픔을 추스릴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 같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이렇게 말하는 임금과 무인으로서 의금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잊으라고 말하며 방도를 찾으라고 채근하는 도원수 권율을 보면서 이순신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무인이자 신하이기 이전에 그도 감정이란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모질게 대하고, 버리려 했던 임금이다. 심지어 자신이 일궈놓은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린 상황이다. 소설 속에서 이순신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심정을 여러 차례 표현하고 있다. 현실의 이순신도 소설 속 이순신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무인으로서 조국이 왜군의 발 아래 짓밟히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신하로서 임금이 왜군의 칼 아래 유린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이순신은 죽음조차도 쉬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 내던져진 것이었다.[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 내 어깨에는 적이 들어와 살았고, 허리와 무릎에는 임금이 들어와 살았다. (중략)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이 두 글귀에서 나는 이순신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방도가 없는 세상에서 방도를 찾기 위해 이순신은 명량으로 향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옛 속담처럼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으나, 이순신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 덕에 조선은 위기에서 한걸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임금 선조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적은 여전히 강성했다. 명량에서 패한 왜군은 이순신에 대한 보복행위로 아산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섯째아들 이면을 잃었다.
임진일기(壬辰日記)학번 : 000000000, 이름 : 000000우리는 흔히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하면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떠올리곤 한다. 임진왜란 당시 고위관료였던 두 사람이 남긴 기록이니 만큼 난중일기와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반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살펴봤을 때, 이번에 읽게 된 임진일기(壬辰日記)는 앞서 언급한 두 기록과는 다른 면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임진일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14일부터 12월 27일까지 약 240일 간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기록해놓은 일기(日記)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정의 고위관리였던 이순신, 류성룡과는 달리 검간 조정은 상주에 거주하던 사족(士族), 즉 양반이었다. 그러다보니 조정이 기록한 임진일기에는 피난생활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의 삶을 비교적 상세히 그려볼 수 있다.가령 임진년 4월 20일에 적힌, “집에 있는 세간은 처리할 겨를이 없어 상자 같은 물건들은 땅을 파 묻거나, 마룻바닥 아래에 감춰두었으며, 신주는 다만 주신(主身)만 받들어 꺼내고 모두 궤짝 하나에 담아 깨끗한 곳에 묻었다.”라는 기록이나 혹은 4월 30일에 적힌 “평소에는 다만 도토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직접 맛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먹어보니 제법 따뜻하고 달아 기장이나 조로 지은 밥보다 더 낫고…(중략)” 등이 그것이다. 상주 지방의 사족이었던 그가 얘기로만 듣던 도토리를 직접 먹어봤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피난 가는 이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식량 문제였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가져왔던 식량이 점차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이 든 노모와 나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난 생활을 해야만 했으니 그 고초는 이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4월 29일 기록을 보면 조정은 경솔하게 집을 떠나 피난 온 것을 후회한다는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보고, 듣게 된 전쟁의 참상은 더욱 암울하기만 했다. 조정이 임진일기에 “국가가 평화로운지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이런 소식을 들으니, 간담이 다 내려앉는 듯 하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은 건국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려 200여 년 간 전란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일부 북부지역에서는 여진족을, 남부지역에서는 왜구들을 상대로 국지전을 펼치긴 했으나, 대규모 전쟁이 아니었기에 조선 조정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국방에 대한 소홀로 이어졌다. 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우리에겐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의 저서 토정유고(土亭遺稿)이다. 여기서 이지함은 “지난 계축군적 작성시 쇄리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병으로 죽음을 앞둔 노약자와 나무, 돌, 닭, 개의 이름까지도 (군적에)끌어대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조선 백성들의 병역기피 문제와 주먹구구식 행정 처리를 날카롭게 꼬집은 바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은 임진왜란은 대규모 전란 앞에서 고스란히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다.백성들을 지켜야할 관군은 변변한 싸움 한 번 하지 않은 채 달아나기 바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군들은 조선의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 갔으며, 아녀자들을 데려가 욕보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소?말과 같은 가축을 비롯해 온갖 재물을 약탈하고, 곳곳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지속했다. 이처럼 백성들의 삶이 위태롭고, 곤궁해지다보니 급기야 백성들은 살기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일까지 벌이게 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상황들을 바라보며, 임진왜란이 끝난들 어떻게 백성들이 본업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겠냐는 말과 함께 탄식하기도 했다.특히 임진왜란 중 의병에 가담하기도 했던 조정은 왜적 앞에서 변변한 전투조차 벌이지 못한 채 달아나는 관리들에게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진일기 4월 23일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하가 되어 녹을 먹는 자는 은혜를 알고 덕에 감동할 만도 한데 난을 만나 구차히 화를 면하려 하고 심지어 군사를 버리고 먼저 달아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나라를 저버린 자는 너무도 죄가 많아서 용서하기 어려우니, 애통하고 애통하도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적 앞에서 지리멸렬하는 관군들을 가리켜 “(우리의) 힘이 부족해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기려 하지 않은 것이고, 왜놈이 우리를 지치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멸망(滅亡)을 취한 것”이라 비난하기도 했다.조정은 일기 곳곳에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며, 의병들의 활동을 강조했다. 국가와 백성을 지켜야할 관군들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며 달아났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의병들의 소규모 유격전으로 왜적에게 타격을 입히고, 관군과 협공해 왜적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패퇴시킬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사실 그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왜군이 북상을 거듭할수록 그들의 병참선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효과적인 보급을 위해선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서해는 이순신 장군에게 막혀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육로를 통해 물자를 보급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조선의 의병들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고을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의병들은 무엇보다 지리에 밝았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동이 어찌나 거셌든지, 왜군을 따라 종군했던 한 포르투갈 선교사는 “한양으로 물자를 나르기 위해서는 족히 500여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이처럼 이름 없는 의병들을 비롯한 수많은 희생 속에서 조선은 지켜질 수 있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은 조선이 승리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임진왜란 이전 150만 결에 달했던 경작지는 왜란 이후 30만 결로 대폭 줄었으며, 이는 이후 병자호란과 경신대기근으로까지 이어져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왜군은 수많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은 유럽 각지로 팔려나가 노예로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 밖에도 조선의 왕성인 경복궁이 불타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 피해는 천문학적일 것이다.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조정이 임진일기에서 언급했던 “우리가 이기지 못한 것은 스스로 이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누군가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전력 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어차피 이런 결과는 예견된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정의 말처럼 만약 관군들이 전쟁 초기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면 임진왜란의 전황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소 중심으로 본 남북 분단 과정에 대한 설명해방된 한반도가 38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국가이익과 영향이 깊다. 남·북한의 분단 과정을 위해서는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이 중반을 넘어가던 194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1943년 11월 22일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영국의 처칠(Winston S. Churchill) 수상,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함께 한반도 문제를 언급했다. 특히, 여기서는 장제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명 받은 바 있는 장제스는 그 때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함은 물론 한반도의 독립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들은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도록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같은 해 11월 28일에 개최된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서기장인 스탈린이 동의함에 따라 전후 한국문제 처리의 기본전제가 되었다.이후 일본의 패전이 임박하게 되자 미국은 영국, 소련 수뇌들과 함께 1945년 2월 얄타(Yalta)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공식적으로 명문화 되진 않았다. 다만 회담 중 루즈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가 언급되었고, 미·소·영·중 4개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한다는데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다.이처럼 미국이 소련과 한반도 신탁통치를 놓고 합의한 것은 자국의 국가이익, 그 중에서도 국가 생존과 연관된 자국의 안보와 연관성이 깊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 안보와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었다.그 이유는 소련의 팽창에 대해 우려 때문이었다. 두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만 해도 동맹국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두 국가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끈 소련은 독일 치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을 빠르게 공산화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소련의 행보에 미국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미·소 양국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따라서 미 국무부의 정책입안자들은 한반도가 소련에 점령된다면 미 태평양 안보는 위협을 받을 것이라 판단했다. 소련은 미국과 달리 한반도와 인접해 있으며, 무엇보다 1945년 5월에는 이미 독일이 패망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 배치돼 있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먼저 일본 관동군(關東軍)을 격파하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에 특사 흡킨스(Harry Hopkins)를 급파해 스탈린과 회견하고 미·영·소·중 4개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 사항을 재확인했다.태평양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오키나와까지 점령한 미국은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 내용이 포함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다시금 천명했다. 뿐 만 아니라 미·소 양측 군사대표들은 한반도와 만주를 두 개의 작전지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상당히 발전시켰는데, 이 때 한반도 작전경계선이 38도선과 유사한 형태로 고려되어졌다.같은 해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의 패망은 확실시 되었다. 앞서 미국은 테헤란 회담 때부터 줄곧 소련의 대일전선 참전을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빠르게 무너지고, 핵무기까지 완성되자 미국은 오히려 소련이 참전을 결정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고자 했다. 이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후이권을 주장한 가운데 동북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과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음을 눈치 챈 스탈린은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소련이 참전한 상황에서 세력분배에 대한 결정이 늦어진다면 소련은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남진할 것이 뻔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8월 12일 이미 한반도 내 청진에 상륙한 상황이었다. 만주는 이미 소련에 양보한 지역이므로 별다른 대안이 없었으나, 한반도는 얄타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만주와는 상황이 달랐다. 만약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게 점령된다면 미국의 통치 아래 놓일 일본의 안보 또한 크게 위협받을 것이 자명했다. 따라서 미국은 극동지역 가운데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한반도에 대해 뒤늦게나마 관심을 가졌고, 한반도 분할선 확정을 서둘렀다.당시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①소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작전지역은 만주였고, 한반도 전체를 신경 쓸 정도의 여유와 능력은 없었다. ②소련은 미국의 38도선 제안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일본과 밀약해 소련에 대응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일찍부터 동북아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생각했고,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면 미국을 자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제안을 택했고, 이는 미국도, 소련도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은 미·소로 대표되는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정세 속에 분단을 맞아 지금까지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남북한 통일방안 비교 및 한반도 통일전략과 과제1. 들어가며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도 벌써 70년이 지났다. 같은 민족이었던 남북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소모적인 대립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몇몇 강대국은 우주를 향한 포부를 드러내고 있으나 남과 북은 여전히 90년대에 종식된 냉전을 지속하고 있는 꼴이다.더 심각한 문제는 분단의 시기가 길어질수록 통일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진다는 것이다. 직접 분단을 경험했던 세대는 노년이 되었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세대들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통일비용 문제를 비롯해 통일 후 야기될 사회혼란 등을 이유로 그들은 통일에 대해 꺼려하는 경향이 강하다.그러나 통일은 반드시 풀어야할 우리의 숙제이다. 6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며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부상했던 대한민국은 현재 그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중국의 부상과 저출산 문제 등 여러 국내외적인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우리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며,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방법이다. 오랜 군사적 대립을 멈추고, 그로 인한 금전적·감정적 소모를 다른 곳에 투자한다면 국가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영토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온전한 반도로서 세계적인 교통의 요충지로 거듭나게 될 것이며, 저출산 문제로 인한 인구 감소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이처럼 중요한 통일의 문제,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민족의 숙원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과 북이 각각 어떤 방식의 통일방안을 구상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한반도 통일 전략을 구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여겨진다.2. 본문(1) : 남한의 통일방안대한민국은 헌법 전문 중에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는 바로 1972년에 있었던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이다.1970년 당시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냉전이 다소 완화된 ‘데탕트’시기였고, 이러한 세계적 분위기 속에 남북 역시 긴장이 완화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통해 남북간 대화와 협력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고, 이후 1971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북의 단절된 평화의 물꼬가 터지자, 남과 북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최초의 공식문서라 할 수 있는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도모하여야 한다.이어 박정희 정부는 1974년 8월 15일, 한반도 평화정착 → 상호 문호개방 및 신뢰 회복 → 남북한 자유총선거라는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발표하기도 했다.이러한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첫걸음은 그 의미가 대단히 컸다. 6·25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서로를 적대했던 남과 북이 처음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적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이어질 남과 북의 대화에 첫 장을 열었다 할 수 있다.1980년대 말에는 냉전이 해체되면서 적극적인 통일정책이 추진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인 7·7선언을 통해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상호 교류와 이산가족 문제, 교역의 민족 내부화 및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등을 제시했다. 1989년에는 통일의 중간단계로서 ‘남북연합’을 담고 있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통일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를 담았고, 미래 통일국가상으로는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제시했다. 이후 여러 차례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1992년 2월 ‘남북기본합의서(남북사이의 화해였다.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에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노무현 정부 역시 이전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정책을 계승해 통일·외교·안보 분야 전반을 포괄하는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했다. 2007년 개최된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10·4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통해 남북은 상이한 체제에 대한 상호존중을 토대로 정치·경제·사회 등의 영역에서 통일을 위한 공동사업을 추진할 것을 합의하였다.1. 남과 북은 6·15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 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이에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6·15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해 나가려는 의지를 반영하여 6월 15일을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다.2.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전환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관계 문제들을화해와 협력, 통일에 부합되게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 확대와 발전을 위한 문제들을 민족의 염과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북은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며 민족내부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 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을 빠른 시일안에 완공하고 2단계 개발에 착수하며 문산-봉동간 철도화물수송을 시작하고,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보수 문제를 협의·추진해 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6. 남과 북은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빛내기 위해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백두산관광을 실시하며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남과 북은2008년 북경 올림픽경기대회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처음으로 이용하여 참가하기로 하였다.7. 남과 북은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과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 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데 따라 쌍방 대표를 상주시키고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상봉을 상시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자연재해를 비롯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 동포애와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 따라 적극 협력뢰 프로세스의 개념에 따라 정부는 ‘신뢰 형성을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 추구’, ‘통일 인프라 강화’, ‘한반도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의 선순환 모색’의 4가지 중점 추진 과제를 제시하였다.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이라는 비전 아래 3대 목표, 4대 전략, 5대 기본원칙을 세우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1. 3대 목표① 북핵문제 해결 및 항구적 평화정착② 지속가능한 남북관계 발전③ 한반도 신경제공동체 구현2. 4대 전략① 단계적, 포괄적 접근② 남북관계 북핵문제 병행진전③ 제도화를 통한 지속 가능성 확보④ 호혜적 협력을 통한 평화적 통일기반 조성3. 5대 기본원칙① 우리 주도의 한반도 문제 해결② 강한 안보를 통한 평화 유지③ 상호존중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④ 국민과의 소통과 합의 중시⑤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통한 정책 추진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들과는 달리 3차에 걸친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특히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판문점에서 6·25전쟁 종전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담은 ‘판문점 선언’을 채택하는 등 나름의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9·19군사합의(판문점선언이행 군사분야 합의)’를 통해 상호간 GP 일부를 철수하는 등 서로간의 군사적 불신과 적대행위를 중단하기 위한 노력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이어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남북관계와 통일의 실현을 현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끝내 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통일에 있어 가장 최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만 하는 북핵 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북핵 폐기에 있어 대단히 미온적일 뿐 만 아니라 그런 의지조차 보이질 않고 있다. 그로 인해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있었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결렬돼 버렸고, 남북관계 역시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3.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