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수1,2)중.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공부할 때 다른 역사 사건과는 달리 임진왜란, 임진왜란 전 후 사건들의 내용이 뇌리에 꽂혀 기억에 잘 남았다. 또한 임진왜란은 한 나라 안에서만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 명, 일본 등이 개입된 전쟁으로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특징, 관계를 파헤쳐 보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안에 임진왜란이 들어갈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전쟁 기간 7년 동안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 지역이 전쟁의 참화를 겪어 그 당시 한국인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던 사건이다. 따라서 지금의 반일 감정은 임진왜란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에 가치가 있을 것 같아 임진왜란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은 매우 평화로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조선에서는 약 200년 간 대규모 국제 전쟁이 없었기에 평화로운 상태였다. 또 이웃 나라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군사력도 약해졌고 군사력을 키운다는 개념도 없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 내에서는 신하들이 동인과 서인 두 파로 갈라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붕당 정치가 생겨났다. 또 사화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졌다. 양반들이 토지를 겸병하고 농장을 확대하면서 농민들의 부담과 경제 모순이 심해졌다. 사대. 교린 정책을 펼치던 조선은 명과의 사대 관계로 인해 신하로 들어갔다. 그런 명나라는 그 당시 청나라와의 대립으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길고 길었던 혼란의 전국시대를 1587년 하급 무사 집안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을 이뤄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시아 전체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불안해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동태를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파견되었던 통신사 김성일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라고,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으니 전쟁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여 논쟁을 벌였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났다. 결국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전국시대 혼란의 종지부를 찍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소에 한반도와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에 1592년 조선에게 명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명과 사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길을 내어 줄 수 없었다. 조선의 수교 거절에 결국 일본은 20만 군사를 동원해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은 무서운 기세로 부산에 다다른지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차지했다. 이에 임금 선조와 지배층들은 궁궐을 버리고 북쪽 의주로 도망쳤다. 일본군은 한 달이 좀 지나자 개성을 점령했고,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백성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책임한 지배층들의 행동에 화가 나 직접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고 전쟁을 벌이면서 육군의 힘은 강했지만 수군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학익진 전법 같은 뛰어난 활약도 더해져 수군이 전쟁을 뒤집게 된다. 이에 따라 육지에서도 일본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했고 육군 역시 일본에 제대로 대항하면서 승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전투들이 있는데 각각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으로 이를 3대 전투라고 부른다. 먼저 한산도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바다에서 일본의 수군 침략에 맞서서 대승을 거뒀던 대첩이다. 일본은 육지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해전에서의 계속되는 패배에 더 많은 배를 이끌고 나왔지만 이에 이순신 장군은 일본보다 더 많은 배와 전함을 끌고 나와 결국 승리하게 된다. 대첩이 일어난 한산도는 사방으로 빠져나갈 길이 없었으며 육지로 상륙을 한다고 하더라도 굶어 죽기에 딱 좋은 곳이어서 조선은 일부러 이곳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한 것이다. 두 번째로 행주대첩은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의 침략에 대승을 거뒀던 전투이다. 1593년 약 1만여 명의 병력을 행주산성으로 집결시켰고 권율 장군은 당시에 행주산성을 구축하여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책을 만들었다. 왜군들은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둘러싸서 총 아홉 번의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병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성하는 등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마지막 대첩은 진주대첩이다. 진주대첩은 진주성에서 일어난 2번의 전투로, 그 중 1차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이때 당시에 진주 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의 명령으로 약 3800명의 조선군 병사들과 맹렬한 전투가 있었다. 이에 의병 곽재우가 합세해 성문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화약을 장치해 왜군들이 만들어 놓은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돌을 던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 끝에 왜군 공격 방어에 성공했다. ?이때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게 되면 자국까지 침략할 것을 우려해 지원군을 조선으로 보냈다. 명나라 군대까지 조선을 도와주니 불리해진 일본은 경상도 쪽으로 점점 후퇴를 시도한다. 그리고 장기전에 대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일본의 기세가 좀 꺾이자 명은 조선과 일본의 화해의 자리를 마련했지만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고 결렬되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실상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중국의 한나라가 그랬듯이 전란을 겪고 나서 강대국이 된 나라들을 살펴보면 항상 대외 전쟁을 했었다. 전란 당시 남아있던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게 되면 항상 위험 요소가 되고 중앙 집권을 하는 데 방해가 되곤 했었다. 실제로 약 100년 동안 전쟁을 치른 일본에는 병력과 무기, 전쟁을 위한 물자들이 넘쳐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몇몇 힘 있는 장군을 제압하고 조총으로 위협해 전국시대 통일까지 이뤘지만 여전히 각 지방에 막강한 세력들이 살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쓴 방법이 임진왜란이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수교를 조선은 무시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침략하자 막아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어떻게 해도 아쉬울 게 없는 계획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조선이든 명나라든 어느 한 나라는 차지할 수 있었고 지더라도 조선의 많은 인재와 물자를 약탈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이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약 200년 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19년 나라를 빼앗기는 데 이르게 된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국방을 튼실히 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2021-1학기 기말 레포트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교과목명: 논리적 사고담당교수:시간/교시:제출자/학번:제출일:쇼펜하우어는 독일 철학자로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였다. 어린 시절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고, 플라톤과 칸트의 사상과 더불어 인도 철학에 심취해 이것이 그의 철학의 기본 틀을 이루게 되었다.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들을 38가지 요령으로 정리한 책이다.쇼펜하우어는 ‘논리학’과 ‘토론술’의 구별을 시도하였다. 그는 ‘논리학’은 이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진리의 추구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만, ‘토론술’은 의지와 감정의 문제로서 각 개인이 자신의 견해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토론술’은 말을 사용하는 존재인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는 속성으로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이는 논쟁 시에 사용할 수 있는 사고와 언술의 민첩함과 재빠름, 전문성을 포함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대결에서 패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곤 한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토론술’의 목표로 두었다. 그가 이렇게 목표를 둔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성악설, 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근거한다. 인간은 무조건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고 절대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38가지 요령으로 나누어 기술한 것이다. 38가지 요령 중 가장 중요하고 기억에 남았던 것들을 설명하겠다.첫 번째는 “요령 3. 상대방의 구체적인 주장을 절대화하고 보편화하라.”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제시된 주장인 것처럼 말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여 바로 그 점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한 말은 참으로서 제시된 논제와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순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해 그 논리적 추론 방식을 문제 삼는 직접적인 반박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대응하는 두 가지 방법은 요령 4, 5와 같다.두 번째는 “요령 4. 당신의 결론을 상대방이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하라.”이다. 대화를 하는 중에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내가 내세우는 전제들에 대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별적으로 시인하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온갖 술책을 시도할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시인을 얻어낼 때까지는 나의 게임을 상대방에게 숨기고 결론을 먼 데서부터 끌어내라는 것이다.세 번째로 “요령 5. 거짓된 전제들을 사용하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내세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거짓된 전제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 자체로만 보면 거짓이지만 논쟁 상대방과 관련하여 보면 참인 명제들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토대로 하여 시인을 얻어내도록 해야한다. 거짓된 전제들로부터도 참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네 번째, “요령 6. 은폐된 순환 논증을 사용하라.”이다. 이것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을 4가지 방법들을 통해 기정사실로 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거나 다른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 가지 특수한 예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학이 불확실하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의 불확실성을 기정사실화해 버리곤 한다. 세 번째, 두 가지가 동떨어져 있을 때, 한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기정사실의 것으로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보편적인 것을 입증하려면 각개의 개별적인 것에 대해서 스스로 시인해야 한다.다섯 번째, “요령 12.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에 유리한 비유를 재빨리 선택하라.”이다. 이 방법은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순환 논증에 속한다.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이 밝히고자 하는 바를 일단 말로 표현하거나 명명하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대화 상대방의 순전히 분석적인 판단을 통해 전자가 뜻하던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것이다. 말 정도라고 한다.여섯 번째는 “요령 15. 안개 작전을 사용하라.”인데, 처음에 보고 안개 작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선택했다. 여기서 말하는 안개 작전은 상대방을 가지고 놀 듯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도의 뻔뻔스러움이 전제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대방에게 하나의 참된 명제를 제시하여 거기서 증거를 만들어 내려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도록 한다. 상대방이 거부하면 우리는 명제의 불합리성을 증명해 보이고 승리를 거둔다. 반면 상대방이 그 명제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일단 분별 있는 말을 한 마디한 것으로 생각하고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일곱 번째는 “요령 22. 상대가 억지를 쓴다고 큰소리로 외쳐라.”이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현재 논쟁 중인 사안의 결론과 직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시인하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진실로 간주해 버리려고 한다고 함으로써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나 청중은 논쟁 중인 문제와 유사한 명제를 문제 자체와 동일시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논거를 제거할 수 있다.여덟 번째, “요령 24. 거짓 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내라.”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사용한 개념들에 대한 거짓 추론과 왜곡을 통해서 상대방의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또 상대방의 의견도 결코 아닌, 아닌 오히려 부조리하고 위험스러운 명제들을 억지로 끌어낼 수 있다. 그러면 상대방의 명제로부터 그 자신의 다른 주장이나 이미 인정한 진리들과 부합하지 않는 그와 같은 명제들이 도출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간접 반박에 해당된다.아홉 번째, “요령 27. 상대가 화를 내면 바로 거기에 약점이 있는 것이다.”이다. 이것은 당연한 얘기 같다. 논쟁을 펼치다가 어떤 논거에 대해 상대방이 느닷없이 화를 내면 우리는 이 논거를 가지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들었다. 여기서는 경외심에 호소하는 논거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 즉 여러 가지 근거를 대는 대신에 상대방의 지식수준에 맞추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크게 와 닿은 것은 세네카가 “사람들은 누구나 판단하기보다는 그냥 믿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존경하는 권위를 우리가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논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 상대방의 지식과 능력이 제한되어 있으면 우리에 대해서 그만큼의 많은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반면, 상대방의 지식과 능력이 아주 뛰어날 경우에는 상대방이 우리에게서 기껏해야 약간의 권위를 느끼거나 아니면 전혀 권위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이에 반해 평범한 일반 사람들은 어떤 방면의 전문가들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의사, 변호사 등과 같은 사람들을 보듯이 말이다. 우리는 어떤 전문적인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아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대개 남을 가르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열한 번째, “요령 31. 당신의 말은 형편없는 내 이해력을 넘어서는군요.”이다. 이 요령은 상대방이 설명한 근거에 대해서 아무런 반론도 제시할 수 없을 경우 미묘한 반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선언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존경하는 청중을 향하여 상대방이 한 말이 모두 허튼소리라는 사실을 환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우리가 청중들로부터 상대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명망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다음 열두 번째는 “요령 36. 의미 없는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라.”이다. 논쟁에서 의미 없는 말들을 많이 하라고 하는 것은 좀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발짝 다가가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혼란스럽게들리는 허튼 소리를 아주 진지한 태도로 대하고 그것이 마치 우리 견해의 명백함의 증거인 것처럼 내세움으로써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마지막 요령으로 “상대가 너무나 우월하면 인신공격을 감행해라.”를 내세우고 있다. 상대방이 우리보다 우월하여 우리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을 경우에는 인신공격과 모독, 무례의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논쟁 상대방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악의적인 말을 하고 모욕을 하고 거칠게 대한다. 이것은 매우 애용된다. 누구나 이 규칙을 실행할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토론을 잘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요령을 배웠는데, 평소에 토론을 할 때 느껴보았던 점도 있었고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있어서 공감이 되었고 도움도 많이 되었다. 특히 요령 36에 나왔던 내용 중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이해를 잘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은 척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면, 우리는 허튼 소리를 마치 우리 견해의 명백함의 증거인 것처럼 내세움으로써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동양어문학과 202033195 진소정인간은 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이 이성적이기도 하고 비이성적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이성적이였던 인간도 비이성적이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이성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어떤 때에는 비이성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먼저 이성주의는 사전적인 의미로써 우연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성과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해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하고 인간의 사유 능력과 자율성을 중시해 보편성, 객관성, 논리성을 포함 한다.이성적인 인간의 특징을 살펴보면, 감정을 덜 중요시 여긴다. 평상시 사고를 할 때 감정을 어느 정도 배제시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사고를 하기도 한다. 개인, 개별을 중시하는 비이성주의와 달리 이성주의는 일반적,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면이 덜 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들은 무언가 갑자기 발생하
“대한 독립 만세”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교과목명: 한국사담당 교수:시간/교시:제출자/학번:제출일:1. 서론-3.1 운동의 배경2. 본론-3.1 운동의 전개 과정3. 결론-3.1 운동의 결과1910년대는 무단통치의 시대이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탄압된 뒤 한국의 의병. 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해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선 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로 한국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서슬 퍼런 헌병 경찰 통치 시대에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 만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국내 저항운동은 비밀결사 조직! 으로 정리할 수 있다.이 같은 활동의 결실은 1919년 2월 8일 독립 선언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은 폭력적 통치를 해왔던 일본에 남녀노소, 신분, 계급, 지역, 당파를 초월하여 전 민족이 봉기했으며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지금까지 정의 내려지고 있다.조선에 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45년에는 낭인들을 동원하여 황후인 명성황후를 사해하였으며 1897년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던 고종을 협박하여 조선을 식민지 국가로 전략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나라의 국권을 잃고 35년간 식민지 통치에 들어간다. 일제는 완벽한 식민지 지배를 하기 위해 독자적이며 행정권, 입법권, 군대 사용권을 행사하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더불어 중앙. 지방 관리는 친일파 중심으로 임용하였다.민족을 탄압하는 통치 방식은 무단통치였다. 조선인들을 다스리기 위한 대표적인 제도는 헌병경찰제로 병합에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항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는 제도이다. 헌병 경찰은 조선인의 모든 일상생활에 관여하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권한 중 하나는 태형령이다. 태형령은 대표적인 차별법으로 조선인한테만 적용되고, 일본인은 때리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잡아간 즉시 법 절차 없이 바로 벌을 줄 수 있는 즉결처분권도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학교에서 교사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해 학생들을 위협하였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이 대표적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한 사건으로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병합을 반대한 독립운동 세력을 2년 동안 탄압하였고,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국외에서는 1차 세계 대전이 지속되면서 승전국과 패전국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300년간 열강을 유지하였던 유럽 대륙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전멸하였다. 결국 1차 세계 대전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종식되었는데 이때 일본과 미국은 또 다시 갈등을 겪게 된다. 미국 대표로 강화회의에 참석했던 윌슨 대통령은 승전국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회복해야하는 책무와 식민지 상태의 약소국 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기본권을 강조하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함으로써 일본의 대륙 침략을 반대하였다. 이 주장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우리는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견한다. 동시에 독립 청원서를 작성해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또 이 시기에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인 레닌 역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다. 레닌은 민족해방운동에 나선 약소국들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윌슨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윌슨이 이야기한 민족자결주의의 민족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된다. 즉 일본의 식민지에는 해당되지 않아서 우리는 예외라는 것이다. 결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를 좌절시켰다. 반면 레닌의 약소국 지원은 패전국이든 승전국이든 모든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다. 우리에게 희망이었다.따라서 이러한 의지를 담은 선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대한 독립 선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2.8 독립 선언이 일본 도쿄에서 발표된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한인 유학생들 간에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 유학생 학우회, 조선학회 등의 애국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들은 겉으로는 친목과 학술 연구를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애국 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이 세계 대전의 종전이 독립운동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있는 상하이의 청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과 ‘동경 유학생’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고 이를 일본 정부, 대사 등에게 보내는 것이 민족독립운동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독립 선언, 자금 등을 준비하였고 1919년 2월 8일 각국 대사, 일본 정부, 언론사에 보냈다. 이날 오후 2시 YMCA회관에서 학생 등 400명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결의하였고 이를 안 일제 경찰은 학생들과 대중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탄압에 실패하였으나 2.8 독립 선언이 갖는 의미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독립운동이였다.이처럼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였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국민들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국민 모두 민족적 항일 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3.1 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날짜를 3월 1일로 한 것은 고종의 장례식 기간을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 민족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것이다.민족대표 33인은 처음엔 2.8 독립 선언처럼 선언만 하고 끝내기로 했었다. 그러나 33인 중 29인이 탑골공원으로 가려다가 그곳에 모여 있는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란다. 여기서 선언했다가는 큰 사고가 나겠다고 생각해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서 선언을 하기로 했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은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를 안 일제 경찰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왜 민족대표 33인이 안 오는지 알 수가 없게 되자 학생들이 태화관에 달려왔다. 거기서는 학생들보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으라고 하였다.“우리들은 지금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하노라. 이러한 사실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서 인류 평등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분명히 밝히고, 이러한 사실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하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이라고 하는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농촌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는 농민들에게 악몽과 같았다. 3.1 운동의 구성원 대부분이 농민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토지조사사업과도 연결되어 있다.3.1운동은 비폭력으로 출발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폭력 투쟁으로 바뀐다. 일본 헌병들이 기관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사람 중 한 명이 유관순인데 옥중에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르다가 결국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비폭력,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던 우리 민족과 달리 일제는 처음부터 총을 사용해 탄압하고 시위하고 있는 군중들을 학살하였다.대표적인 탄압으로는 유관순이 선도하는 천안 아우내 장터의 4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에서는 일제 군인이 무차별 총격을 하여 현장에서 많은 농민을 학살하고 군중들이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은 곧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고 19살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뒀다.또 경기 수원시 화성군 제암리에서는 일제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을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에 몰아넣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불을 지른다. 견디다 못해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쏴 다 죽여 버렸다. 이를 ‘제암리 학살 사건’이라고 부른다.이러한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 헌병 분견소나 경찰과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며 항일 시위를 계속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봉기하여 전개된 한국 민족의 3.1 운동은 2백여만 명이 봉기하였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더욱 막강해진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한국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3.1 운동은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일본의 통치 형태를 바꿔 놓았다. 무단 통치가 문화 통치로 바뀌게 되었다.그다음, 우리나라의 임시정부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3.1 운동이 실패한 것은 우리 민족을 힘차게 이끌어 갈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3월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국민 의회가 4월경 한성과 상해에 임시정부가 각각 세워졌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하나로 묶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상해에 통합해 세우게 된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민이 된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해 외교 활동을 잘 수행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큰 특징은 3권분립에 입각한 최초의 공화국 정부라는 것이다. 3권분립에서 입법 기관은 임시의정원이고, 사법 기관은 법원, 행정 기관은 국무원이다.상하이의 임시정부에는 사료 편찬소를 두어 독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미주 지역에는 외교를 위해 구미위원부를 두었다.이렇게 점점 조직을 갖추어가며 활동하던 임시정부에 위기가 닥치게 되는데, 연통제(행정 조직)와 교통국(정보 조직)의 지부들이 거의 다 발각된다. 이로 인해 돈줄이 막히게 되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행위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국제연맹 청원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임시정부의 진로를 논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는데 합일점을 찾지 못해 결렬되고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