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익(李瀷)도 신분세습법(身分世襲法)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습제의 폐지는 결국 1세대가 지나면 자연히 노비제도가 폐지되는 것으로 집권세력에 의하여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각개국가의 독립된 주권이 인정되는 주체적( 「시장을 위한 생산」을 전개하는 상업적인 농민 및 상공업자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물가의 끊임없는 ... 황상(黃裳), 황취(黃聚), 이정(李晸)과 같은 향리의 자제, 이중협(李重協), 정하응(鄭夏應)과 같은 몰락무반가(沒落武班家)의 자제, 혹은 정수칠(丁修七), 이강회(李綱會), 윤자동
는 신경준이 "척량촌도(尺量寸度)에 의한 정밀한 지도"로 평가했으며 이익(李瀷)이 "백리척을 축척으로 써서 그린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찬사한 바 있다. ... 태종 2년(1402)에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 등이 만든 는 최초의 세계지도로 등장한다. ... 한편 이제까지의 지리지가 지리적 사실 자체의 기록에만 충실했다면 18세기에 나온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는 본격적인 인문지리서로서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기호남인(畿湖南人)을 통하여 계승되어, 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 ...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흠()이고,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 뒷날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 ·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 명칭은 후배 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그는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의 문집을 얻어 읽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학문의 목표로 세웠다. ... 그리고 이익의 종손 이가환(李家煥)과 그의 학도인 권철신(權哲身), 채제공(蔡濟恭), 이승훈 등과 어울렸으며, 박지원과 그의 제자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과도 교유하여 ... 그들의 실학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23세에 그는 친구인 이벽(李蘗)에게서 서양에 관한 새로운 소식들을 흥미있게 듣기도 하였고, 또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 갔다가 가져온
. 10세에 때인 1771년부터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6세에는 처음으로 성호(星湖)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6세에는 처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 ... 이 무렵 이벽(李蘗)을 통해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었으며, 서양에 관한 사정을 들었다.
그러나 『천주실의』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상적, 종교적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인 성호학파에 ... 이때 조선에서 『천주실의』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이수광(李?光)이다.
논문 李相玉, 「淸代 考證學 移入에 대한 硏究」, 『사학연구 제21호』, 한국사학회, 1969. ... 정치적 제도개혁을 주로 하는 저술로는 이른바 경세치용파로 일컬어지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 李康範, 「淸代 초기 考證學 발전의 정치적 배경 연구」,『중국어문학논집 제33호』, 중국어문학연구회, 2005. 崔紹子, 「明淸文化와 朝鮮」,『이화사학연구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