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3. 불상 명문 Ⅲ. 결 론 참고 문헌 Ⅰ. ... 묘지(墓誌) 묘지는 죽은 이의 신원과 생애, 태어나고 죽은 해 등을 기록한 것이다. ... 결 론 본고에서는 비문(碑文), 묘지(墓誌), 불상 명문에 대해 살펴보았으나 이 외에도 종명(鐘銘), 도검명(刀劍銘), 목간(木簡), 토기 명문, 와전명(瓦塼銘) 등 다양한 유형의
(墓誌)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높았다.” ... 그러나 필자는 나라가 망한 직후에도 부여융 묘지명에도 위와 같은 평가를 하고 있는 점과 즉위 이후 신라의 40개의 성을 빼앗고 정치 개혁을 단행한 점을 보아 단지 당시의 정세를 읽고 ... 삼국사기’에는 용맹하고 결단력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서 ‘해동증자(海東曾子)’ 또는 ‘해동증민(海東曾閔)’이라는 찬사도 따라다녔다고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 공주와 넷째 딸인 정효 공주의 묘지(墓誌)에는 문왕을 황상이라 표현하고 있다. ... 아직 묘지의 전문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묘지에 황후라는 호칭을 쓴 점이 주목된다. 발해가 당과 대등한 격을 지닌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운영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 또한, 몇 년 전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 시(和龍市)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해 문왕의 부인 효의 황후(孝懿皇后)의 묘지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 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후기에 이상형으로 생각한 직계가족과 크게 달랐음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가족유형을 연구하는 자료로는 각종의 호적문서와 실록, 그 밖의 자료(묘지명 ... ), 출가한 자매가 동거한 사례(『高麗史』 卷124 列傳 37 裵佺), 아버지가 출가한 장녀의 집에서 사망한 사례(「延德郎君韓氏墓誌」), 부모가 아들과는 별거하더라도 딸과는 동거하며 ... 부모를 여읜 후 백숙부나 당숙부 집에서 양육된 것이 아니라 외가에서 양육된 사례(『高麗史』 卷99 列傳 12), 출가한 딸이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서 생활하는 예(「崔婁伯妻廉氏墓誌
묘지문(墓誌文)에 얽힌 이야기 5. 제악어문(祭鰐魚文) 6. 왕정주(王廷湊) 의 난(亂) 한유(韓愈) Ⅰ. ...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이었던 파주자사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그의 묘지명에
이 묘지명은 한유가 袁州刺史(원주자사)로 재임하던 당 헌종 15년(820년)에, 벗 유종원의 귀장에 지은 것이다. ... 이 작품을 묘지명터 영리하고 민첩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逮其父時,雖少年,已自成人,能取進士第,嶄然見頭角。衆謂柳氏有子矣。 ... 작품 소개 柳子厚墓誌銘(유자후묘지명) 유종원의 유언에 따라 한유가 쓴 것으로, 조상의 일로부터, 그의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유종원에 대한 경력, 성격,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墓誌 4. 『韓國金石全文』中世 上 330 田起配高氏墓誌 5. 『高麗史』卷 81 兵志 1 五軍 恭愍王 5年 6月 1번은 田柴科의 가장 기본적은 기록이다. ... 이 기록은 최득평 묘지에서의 ‘죄를 지으면 환수하는데 이를 반드시 얻어야 할 자에게 주었다’라는 절차가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좋겠다. ... 墓誌중 일부이다. 이 내용은 장남 伸沅의 외아들이 할아버지의 門蔭을 받고 후임으로 되어있다. 또 둘째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명경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