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學’의 精髓는 The essence of Nam-myeong's Learning(南冥學) can be found in '24 Diagrams(24圖)' which be inserted in Nam-myeong's famous book of [Hak-ki-ryu-..
이 논문은 南冥과 退溪 先生의 用韻 系統을 歸納했는데, 이 系統으로 平水韻 과 比較하고, 中國의 詩人인 蘇軾과 高啟의 用韻 系統을 比較하여 退溪와 南冥 의 用韻 系統의 특징을 지적해내고 ... 우리들은 응당 南冥・退溪의 押韻 체계가 平水韻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한다. ... 南冥이 入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8을 점하고, 退溪는 入 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13을 점한다.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의 내용 및 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 남명의 인간관계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간관계, 마음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
이 논문은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이 남명 조식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핀 것이다. 조선유학사에서 퇴계와 남명의 위상은 재언을필요로 하지 않는다. 후일 퇴계계열은 남인으로, 남명계열은 북인으로갈렸는데, 남북의 분열은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퇴계 이황과 ..
본고는 16세기 초 경상좌도의 퇴계학파와 더불어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경 상우도 남명학파의 宗匠이 된 南冥 曺植의 문학과 교육에 관한 연구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고에서 그의 문학에 나타난 敬·義 사상을 바탕으로 한 實踐躬行과 그의 교육에 나타난 因人施敎의 下學上達의 ..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남명학파(南冥學派) 02’ 최한울 06’ 박현수, 유우상 Ⅰ. ... 들어가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한국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경상도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1. 에피쿠로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으라”, 또는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이상이다. 카르페 디엠은 고대 헬레니즘 철학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Epikouros)학파를 상징하는 말이다. 카르페 디엠은 먹고..
그 당시는 德川書院을 南人들이 주도하였으므로 南冥의 묘소 밑에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세웠다. ...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지 않았다.처음에 南人의 영수와 西人의 영수에게 南冥의 碑文을 동시에 받은 것이 論難의 발단이었다. ...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나중에 三嘉 龍巖書院의 廟庭碑로 세워졌다. 1764년 『南冥別集』을 만들어 南冥에 관계된 附錄文字를 수록할 때도 眉叟와 龍洲가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었지만,
구암 이정(1512-1571)은 1544년 그의 나이 33세 이후 퇴계를 사사하여 그 학문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이루려 하였음은 물론, 인근 고을에 거처 하던 남명과도 끊임없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고상한 정신 경계를 추앙하 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