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마을 위령비 ( 출처 : 신다은 , 2023 ) ‘ 하미마을 ’ 에는 2001 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 만 5 천달러를 지원해 준공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가 있습니다 ... 탐스펍 ( 출처 : C Y LEE , 2019)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 다낭에서 차를 타고 20 분 거리에 위치한 ‘ 하미마을 ' 과 하미마을에서 차로 15 분 거리에 위치한 ... 이렇게 그날의 아픔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하미마을에 방문해 되새기는 기회를 가져봅시다 .
증오비에는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편, 영국과 일본에서는 빈호아 학살에 희생당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세웠다. ... 미군에 의 저질러 놓았는데, 위령비는 영국에서 세우고 초등학교는 일본인이 지어줬다는 뉴스는 정말이지 아이러니하였다. ... 하미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2일(음력 정월 24일) 청룡 부대의 3개 소대가 하미마을을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들어와 마을 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현재 빈호아 마을에는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와위령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 하미마을 학살사건 1968년 2월 22일, 청룡 부대의 3개 소대는 베트남 하미마을을 에워싸고 마을 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곳은 하미마을과 빈호아 외에도 수십 곳에 이르는데, 이 박물관에서는 당시 학살된 민간인 수와 상황을 담은 사진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2.
이전에도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사과와 보상을 먼저 제안하고, 하미마을에 위령비를 세워 참배하기도 하였으며 봉사단체도 파견하면서 베트남에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 한국군 증오비를 포함해 역사적인 자료들을 볼 때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용병이란 미명으로 베트남에 가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예로 하미마을의 예를 들고 싶다. 1968년 2월 22일 하미마을에서 한국 해병대, 지금도 유명한 청룡 부대가 마을 주민 ... 한국사회가 지금까지 은폐한 역사적 사실 중에 하나가 베트남에 있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일 것이다. ... 문에 전쟁에서 돌아온 베트남 국민들이 마을의 참혹한 광경을 보고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위령비들을 세웠다고 한다.
Ha My 마을에서는 피해자 유족과 지역 주민들의 염원에 응하여 현지 정부와 한국 참전 군인들의 단체 등이 자금을 2000년에 위령비를 건립하였으며, 한국군에 의한 학살 사건 50주년 ... 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1968년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한 퐁니·퐁넛 양민 70여명 학살 사건 외 하미마을 학살 사건 등으로 5,000여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들이 ... 베트남 양민학살 위령비와 문대통령의 사과 (http://www.newsis.com/view/?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에는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위령비가 있다. 1968년 2월 12일에 벌어진 이 학살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와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죽였다. ... 학살이 일어난 지역에 위령비를 세워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 한 마을에서 몇십 명, 몇백 명씩 죽었다. 지금 당장 풀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베트남의 하미마을에는 전쟁으로 죽음을 맞은 자들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있는데, 2000년도에 ‘월남참전전우 복지회’라는 한국의 참전군인 단체가 자금을 지원해 설립됐다는 위령비의 뒷면에는 ... 그러나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 측이 극도로 낙후돼 있던 벽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면서 문구의 수정을 간곡히 요청해 결국 지워졌다고 한다. ... 또한 참전을 기념하는 기념비도 대한민국에 82곳이 지어졌다.
베트남인들은 위령이라는 행위로 ‘나’와다. ... 하미마을 학살이 그러했고 베트남 전쟁 때 한국인과 베트남 여자 사이에 나온 일명 라이따이한이 그러했다. ... 최근 한국 군인들이 기념비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 것이 이 책에 나와 있는데 기념비는 지역 공동체가 망자를 위로하고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 기념비에 증오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바꾸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