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윤휴'라는 남인계열의 문신학자이다. ... 이를 통해 알수있다시피 윤휴는 북벌의 성공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북벌을 통해 정치적틀과 조선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얻고자했다. ... 윤휴는 숙종시기 북벌상소를 지속적으로 주장한 학자 중 한명으로 그는 다른 북벌 제기론자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연합전략을 제시하게 된다.
윤휴는 훗날 성리학을 비판한 인물로, 유형원은 중농학파로서 실학을 추구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유한준의 기록은 18세기 노론 지식인이 윤휴와 유형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개혁의 틀에 관한 한 둘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윤휴의 학문은 금기시되었던 데 비해 유형원의 경세학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서인 송시열과 남인 윤휴는 경전에 대한 해석으로 대립하였는데, 윤휴를 비호한 윤선거는 그 아들 윤증대에 가서 소론이 되었다. ... 하지만 남인의 산림인 윤휴가 육경을 보다 중시했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 『효경』을 성현의 훈계가 담긴 긴요한 책으로 생각한 윤휴는 선왕의 정치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효경』의 가르침이 베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윤휴와 박세당은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윤휴는 주자의 경전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 대의 주석을 참고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했다. ... 그 후 숙종때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시되었으나 실천에 옮기기 못했고 이시기에 청은 국력이 신장되어 서양문물까지 수용하여 문화국가로 발전해갔다.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으며, 박세당 역시 양명학과 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 반면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윤휴와 박세당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윤휴는 성리학의 태극과 리가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강의 ... 윤휴는 주자학에서 벗어난 한학적인 유학이론을 전개하여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이라는 규탄을 받는다.윤휴는 東州 李敏求의 문인 이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여헌 장현광과 미수 허목의 영향을 상당히 ... 그래서 윤휴는 중용을 10장 28절로 나누고 수장의 천명 솔성 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논쟁 이후 8년째 되던 해(현종 7년, 1666년) 3월에 경상도 유생 생원 유세철 등 천 여 명이 삼년복을 주장하며 허목, 윤휴, 윤선도를 지지하고 양송(兩宋)-송시열, 송준길-을 ... 논쟁의 핵심 내용을 잠깐 들여다보면, 송시열 등 서인의 입장에서는 복제(服制)와 종통(宗統)을 분리하여 인위적으로 복제를 종통에 종속시키는 것을 반대했던 반면, 허목과 윤휴는 일단 ... 하루도 나아가 면회한 일도 없으며, 그의 사업을 논한다면, 원래 평생 동안 기록할 만한 업적이 없는데도, 다만 경자년에 한 번의 상소로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한 까닭에, 허적과 윤휴의
그 뒤 제자인 윤증이 윤선거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의 관계로 인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제간의 의가 깨졌는데 이로써 노소분당이 일어났다. ... 그러나 1659년 9월 효종이 죽으면서 북벌계획은 결국 중지되고 말았으며,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윤휴 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장대로 1년설을 관철하여 ... 예송논쟁은 신권 중심의 정치를 통해 양반 지주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송시열 등 서인들과 군주권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윤휴·허목 등 남인들이 견해가 부딪친 것이다.
이에 윤휴는 『儀禮』의 참최장에 부위 장자전 가공안 주의 第一子가 죽으면 嫡妻 소생 第二長子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라 명한다 를 인용하면서 次長子說 에 입각한 삼년상을 주장하였는데 ... 후반기에는 효종대에 김육과 김집이 분리되었던 것이 김육의 아들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과 김좌명, 김석주가 계속하여 송시열, 송준길, 민유중과 대립되면서 이들과 연결된 허적·허목·윤휴 ... 이에 비해 허목은 차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장자가 되는 것이라 하여 次長子說을 주장하고 윤휴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왕 앞에서는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상을 주장하여
그의 형제들은 과거 급제 후 윤휴 등 남인 핵심 인물들과 교유했다. 특히 그는 윤선도와 함께 해남 만덕사에서 기거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논쟁 이후 8년째 되던 해(현종 7년, 1666년) 3월에 경상도 유생 생원 유세철 등 천 여 명이 삼년복을 주장하며 허목, 윤휴, 윤선도를 지지하고 兩宋을 규탄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 고 하여 기년복을 택하였으나 당시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는 『儀禮』 「斬衰章」의 ‘첫째가 죽으면 嫡妻의 차자를 長子로 세워 이 또한 장자라고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비록 효종이 소현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