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유대치 등이 주장한 개화사상은 우리나라 사회 경제 발전과정에서 새로 자라나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반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사의 최초의 조류로 되었다. ... 유대치, 오경석 등 중인 출신의 선진 인사들은 벌써 지난 세기 60년대에 실학자들의 사상적 유산과 해외로부터 들어온 자본주의적 신지식을 파악하여 나라의 장래를 구원하는 길은 오직 우리나라에도
어윤중은 할아버지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계승하였고 유대치의 영향으로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 먼저 외적요인의 경우 청의 양무론 서적인 『영환지략(瀛環之略)』, 『해국도지(海國圖志)』, 『이언(易言)』 등이 초기 개화사상가인 오경석, 박규수, 유대치 등에게 영향을 미친 점이고 ... 역관 오경석(吳慶錫)은 직업상 여러 차례 중국을 드나들면서 북경의 양무관료들과 접촉하고 신서적들을 구입, 의관(醫官)인 친구 유대치(劉大致)와 김옥균(金玉均) 등 양반 자제들에게 전하여
유대치는 오경석보다 나이는 약간 적지만…오로부터 얻은 세계 각국의 지리 · 역사 번역본과 新書史를 김옥균이 읽도록 모두 제공하였다. ... 오경석은 중국에서 감득한 신사상을 유대치에게 전하였고, 유는 이것을 김옥균에게 전하여 이에 김옥균의 신사상이 태어나기에 이르런 것이다. ... 박규수의 생전에 그 문하의 양반자제들이 사상적으로 결속되기 시작했으며 1877년 박규수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중인 오경석과 유대치, 승려 이동인)의 영향으로 점차 개화파가 정치적
이와 같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의 주역들을 키우누 선구자들이 박규수, 강위, 유대치, 오경석 등이다. ...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개화운동의 주역들을 지도하거나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 박규수는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을 지도했으며 박규수가 죽은 후에는 유대치가 이들을 지도했다. 강위는 김옥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11월 16일 문병 차 개화당의 지도자인 유대치를 찾아 갔을 때, 그도 조속히 거사할 것을 충고하였다. ... 즉 유대치는 다케조에 공사가 귀임한 이래 세상이 소란하여 빨리 거사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일군이 청국에 비해 수 적으로 적은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박영효 등은 개화당이
한국 개화사상의 형성 개화사상의 비조: 오경석, 유홍기(유대치), 박규수 ○ 오경석: 역관. 1858년까지 네 차례 북경 방문. 조선에 닥쳐 오는 민족적 위기 예견. ... 오경석은 큰 충격을 받고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절감. ○ 유홍기(유대치) 유홍기도 오경석의 영향으로 1861년 경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됨. ○ 박규수 박지원의 손자. 1861년 1월
이들 개화파 청년들은 박규수가 병사하자 오경석, 유대치 등과 자주 접촉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2년 뒤에 오경석마저 병사하자(1879) 이들은 다시 유대치의 문하로 들어가 지도를 ... 유대치는 사상적으로 온건한 박규수와 달리 인품을 준수하고 식견이 높았으나 과격한 일면이 있었다.
여태껏 열중 아홉으로 “가을은 독 담화 일절은 유대치나 김옥균의 말로만 제한되지 아니하고 작자 자신의 말로도 볼 수 있어 오묘하였다. ... 위의 담화 일절은 유대치의 말일 수도 있고, 김옥균의 말일 수도 있고, 작자의 말일 수도 있는 것은, 이 말이 이 세 사람이 전하고 싶은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