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코와 접시닦이 소년 엔리케는 투우사 흉내를 내며 노는데 엔리케가 파코를 보며 너는 황소를 만나면 겁먹을 것이라고 놀린다. 파코는 아니라며 몹시 부정했다. ... 엔리케는 당황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다. 심지어 엔리케는 칼을 잡아 빼고, 그러자 파코의 출혈은 더욱 심해진다. ... 엔리케는 그럼 한 번 실제로 해보겠느냐며 묻는데, 진짜 황소를 데려 온다는 것이 아니라 의자에 칼을 붙여 공포에 실제로 부딪혀 보겠느냐는 말이었다.
엔리케왕자에게 신항로 개척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장기적 계획이자 꿈이었다. 1415년 엔리케왕자의 꿈을 실은 탐험선이 리스본의 카보다로카에서 출발하였고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탐험하며 ...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하면서 포르투칼의 엔리케왕자의 꿈으로 시작되었던 한 세기 동안의 노력과 축적되었던 항해기술 빛을 본 순간이었다. ... 당시 포르투칼 왕자였던 엔리케왕자는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와 항해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항해술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 정도로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그 중심에는 엔리케 왕자가 있었다. 엔리케 왕자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탐험사업을 진행하고 적극 지원했으며 엔리케 왕자 사후에도 포르투갈은 지속적으로 탐험을 계속했다. ... 엔리케왕자의 정책은 포르투갈의 번영에 기초가 되었다. 2) 포르투갈의 발전과 무역 엔리케왕자는 선박건조창과 항해학교덕분에 서아프리카 ‘보자도르 곶’ 부근까지 항해하여 금과 노예무역을 ... 엔리케왕자 사후 1488년 희망봉에 도달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1497-1498년에 인도 캘리컷까지 항해했다. 1500년에는 브라질을 자국의 영토로 삼았으며 아시아에 상관(factory
엔리케는 또한 선박개량작업을 후원하였고, 위도를 결정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럽팽창을 선도한 것이 엔리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 바스코 다 가마는 이후에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고 여행을 계속하였고 엔리케 이래 7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인도항로가 개척되었다. ... 『 유럽의 대항해시대 』 향료와 황금의 나라 아시아로 가는 길 영국 역사가들로부터 '항해자(Navigator)'라는 별칭을 얻은 엔리케 왕자는 유럽의 해양팽창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다섯 번째,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서해안 진출 지원이다. 엔리케왕자는 아랍 상인들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뒤, 서아프리카에 도착하여 황금을 가져오게 되었다. ... 엔리케 왕자의 적극적인 지휘 아래 신항로 개척이 국가 차원의 대규모 정책이 시작했다. ... 엔리케 왕자는 지도자로서 유능한 사람이었다. 다만 왕실 주도 교역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엔리케가 죽은 뒤 페르논 로메스라는 리스본의 부유한 상인이 새로운 항로의 탐험을 맡았다. ... 특히 주앙 2세는 해상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엔리케 왕자는 항로 개척을 주도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상아와 노예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탐험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보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