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콩도르세안에서는 초급학교 선생이라는 의미의 교사instituteur와 대학이라는 의미의 lycee가 처음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이는 특히 92년 발미 전투에서의 승리 등 전쟁의 유리한 전개와 함께, 혁명 프랑스의 법을 독일어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혁명 정신을 전파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난 것과 관련이 있다고도
그렇다면 의 발미를 쓴 것은 이 사이의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을 활자로 찍어낸 것은, 일러도 고종 20(1233)년경이 아닌가 한다. ... 아래로는 졸병이나 어린이도 또한 마을의 선생을 찾아가 배운다”는 구절이 고려 사람의 교육열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다”라든가, “아래로는 여염이나 누항 사이에도 경관과 서사가 두서너 개씩 줄지어 있으며, 백성의 자제로서 미혼자들은 무리를 지어 선생을
즉, 〈대장경각기고문 大藏經刻祈告文〉을 통해 팔만대장경 판각의 연혁을 알게 되고, 〈신인상정예문발미 新印詳定禮文跋尾〉에 의해 금속활자의 사용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된 것 등이 그것이다 ...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 〈백운거사전 白雲居士傳〉(전집 권20)은 이규보가 젊었을 때에 천마산에 은거하면서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을 본떠 시와 술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