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 거주자들의 증가 → 1906년(광무 10) 9월, 대구이사청 설치 ▶ 통감부의 군사적·정치적 보호 아래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 → 1907년(광무 11), 당시 대구군수 박중양이 ... 감시로 인해 일상생활 통제 → 침략전쟁 미화에 노출: 대구신사 및 충령탑 조성 친일파 인사들의 활동 → 국민총력조선연맹(1940년 9월): 내선일체화, 황국신민화, 민족의식 말살 ▶ 박중양
그래서 내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의 배후였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 관찰사로 영전하였다(1907). ... 또한 박중양은 1919년에 발생한 3?1운동에 대한 직적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 대구군수로서의 박중양은 그 당시 일본인의 큰 관심사였던 대구성벽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일을 수행했다.
그래서 내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박중양의 배후였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 관찰사로 영전하였다(1907). ... 또한 박중양은 1919년에 발생한 3?1운동에 대한 직적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 대구군수로서의 박중양은 그 당시 일본인의 큰 관심사였던 대구성벽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일을 수행했다.
친일파이던 박중양은 중앙 정부에서 철거 허가를 내지 않았지만 자기 임의대로 공사를 진해하였고, 1907년 4월은 읍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 밖은 일본 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일본 거류민회는 상권 확대와 그들의 거주 공간의 확보를 위하여 대구 읍성의 철거를 건의하였다. 1907년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겸 대구군수이던 박중양이
박중양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로 중추원 참의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선,일제하 귀족 작위를 받은 박중양(朴重陽), 이풍한(李豊漢), 이지용(李址鎔) 등과 친일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병상(曺秉相), 방의석
독언이었는 바, 박중양의 호탕함을 기념했다는 '일소대'를 남겨 두는 것은 그의 행적을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꼴이다. ... 『영남일보』를 보면, 이곳 침산동 주변에 사는 노인 중 상당수는 여전히 박중양을 영웅 호걸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전면에 '일소대'라고 선명히 각인 된 이 비석은 광복 전인 1943년 박중양이 자신의 풍운아다운 기개를 상징하여 세웠다고 한다. 1995년 광복절을 기해 일소대에 관한 기사를 실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