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 송악(개성)의 호족 왕건은 궁예의 신하가 되어 후백제의 금성(전남 나주)을 점령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이후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까지 오른다. (2) 후고구려의 궁예는 ... 왕건은 개성지역의 호족으로 궁예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앞장섰다. ... 그러나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불만 세력들이 918년 을 일으켰고, 왕건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3)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를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고구려는 발해,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로 이어지므로 ‘고구려와 고려는 계승성이 없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좌절시킬 수 있다. Ⅴ. ... 우선,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국가가 주몽의 고려, 궁예의 고려, 그리고 왕건의 고려와 같이 여럿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 일파의 패배나 견훤·궁예의 멸망을 통일을 파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 제10권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열전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신의 기록이다. * 논찬 논찬이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 바, 『삼국사기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북쪽에는 궁예가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 이후 즉위한 효공왕 때 견훤과 궁예에게 지속적으로 땅을 빼앗겼으며, 경명왕 때에는 고려에 항복하는 성주들이 크게 늘어났다. 심지어 경애왕은 후백제의 침공을 받아 자살하였다.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 918년 왕건이 궁예를 추방하고 왕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로 바꿈. ... 이후 910년 후삼국통일전쟁때 나주 일대에서 왕건 군대가 견훤 군대를 상대로 대승 궁예의 폭정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침. ... 거느리고 금성을 치도록하고 금성을 나주 904년 상주등 30여 주현을 쳐서 가짐 906년 왕건에게 군사 3천을 주어 견훤과 상주 사화진에서 싸우게 하여 승리 나주전투 903년 3월 궁예
. - 왕건은 처음에는 궁예의 부하로 있었어요. 많은 공을 세웠던 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미 신라는 기울대로 기운 상태였지요. ... 학습지의 정답을 알려주면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다. - 정답 : 1) 왕건, 호족, 궁예 2) 호족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대두, 새로운 민족 문화의 토대 마련, 실질적인 민족 통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