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녕(永寧) 원년(120) 12월에 부여에서 맏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나라 궁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하였다.? ... 부여 왕의 아들 위구태이다.?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현도를 구원해 고구려,?마한,?예, 맥을 격파하였다.?
우태 ≪주서≫·≪수서≫ 등에 보이는 백제시조 구태(仇台다. ...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 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북사』급『수서』개운: "동명지후유구태, 독어인신. ... 《북사(北史)》와《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위구태(尉仇台)는 구태(仇台)라고도 하며, 부여 출신으로 백제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22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에 패해서 참수형을 당한 후에,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부여를 세웠다 ...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구태(仇台)의 성(姓)이 위(尉)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지(三國志), 북사(北史), 수서(隋書)에는 후한 후기 부여 태자 구태(仇台)가 백제를 세웠다고 전한다.
백제는 사비천도를 통해 16관등제와 22부사제)실시, 왕도 5부제와 방군성제)실시, 오제신五帝神과 구태)묘仇台廟에대한 제의실시, 시호제 정비와 무령왕계에 의한 왕위계승권 확립, 대외관계의 ... 22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 方郡城制 : 지방통치제로 기존의 22담로제 대신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한 方-郡-城체제. ) 백제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중국기록인 ‘주서’에 구태라는
그러나 고구려와 더불어 북방의 강국으로 군림하던 부여가 이 때를 계기로 고구려에 그 지위를 넘겨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왕자 위구태(尉仇台)가 ...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 167년에는 부여재위)의 즉위를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西.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근국(根國)인 구태백제(일명 ... 辰斯王)이 광개토왕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에 말려 둠 A.D 386년부터 A.D 392년 사이 어느 해부터 후연에 조공하면서 후연과 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구태백제와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건국된 A.D 204년 10월경부터 신공황후가 실제 사망한 A.D 247년 사이에 중국의 연호 중에서 泰( )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나라의 太和 ... 경전(經典)이나 금석문에서는 泰는 太나 大로 통용된다 따라서 泰( )는 위나라의 연호이고, 구태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연도는 위나라의 太和 四年(A.D 230년)이다. ... 倭)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宗主國)로 섬겼다고 적혀 있지만 당시 임나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는 임나뿐만 아니라 야마대연맹 전부가 구태백제를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또 해마다 네 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廟)에 제사를 지낸다. ... ―『수서』백제 조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기를 백제성(百濟城)에는 그 조상인 구태묘(仇台廟)를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 그곳에 ...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을 국성(國城)에 세웠는데 해마다 네 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간위거는 이때 이미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A. ... (尉仇台)가 죽자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가 위구태인 듯하지만 분명於釜山五旬乃返夏四月震王宮門柱黃龍自其門飛出.” ... D 238년에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구태백제의 인척 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자 구태백제는 부여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다가
그 뒤 주몽의 원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온조와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했다. 3 구태설(仇台說) -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동명(東明)의 후예인 구태가 대방 ... 『주서(周書)』에도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면서 구태가 세운 나라라 하였다. -> 이처럼 백제의 개국 시조가 온조, 비류, 구태로 다르게 전하는 까닭은 백제왕의 혈통이 중간에
(仇台)가 부여 동명왕(夫餘 東明王)의 후예로서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입국(立國)한 사실을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 주(周)와 통교(通交)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속했던 고구려현(高句麗縣))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며, 백제는 온조(溫祚)의 건국(建國)이 빠르다고 보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상인 구태
{주서(周書)}에도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면서 구태가 세운 나라라 하였다. ...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결국 원자인 유유(孺留)가 내려와 왕위를 계승하자 비류는 동생을 이끌고 남하하여 미추홀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이 외에 또 구태설(仇台說 ...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동명(東明)의 후예인 구태가 대방(帶方)의 고지(故地)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했다고 전한다.
또한 시조묘로서의 仇台墓가 왕실의 제의대상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 이러한 변화는 직계조상으로 인식되어 온 구태에 대한 예우를 높이고 격식을 차리는 것이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실시된 것이 諡號制이다. ... 먼 조상으로 인식되어온 동명에 대한 제의보다는 왕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인식되어온 구태에 대한 제의는 왕실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시키려는 威德王代의 정치적인 목적과 잘 부합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