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에도 유교경전, 역사서, 중국문韻會諺譯≫·≪용비어천가주해 龍飛御天歌註解≫·≪훈민정음해례 訓民正音解例≫·≪동국정운 東國正韻≫·≪사서언해 四書諺解≫ 등은 우리 나라의 문화유산으로서 ... 때는 고제의 연구에 해당되는 것이다. 5) 장경(藏經:서적의 보관 및 관리)적 기능 집현전은 서적을 수장하는 곳으로 계획된 기관이었고 집현전의 도서는 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
거기서 본 책이 내가 문헌조사표를 작성한 『經書釋義』였다. 권두서명은 ‘周易釋義 上’이라고 되어있었고 표지서명은 ‘經書釋義 合部’라고 묵서로 되어있었다. ... 그곳에서 본 책은 『小學諺解』였다. 권두서명이 ‘小學諺解卷之二 ’라고 되어있었는데 내가 본 책이 아마도 2권이었던 것 같다. 표지에는 ‘小學諺解卷’라고 묵서로 쓰여져 있었다. ... 판심제는 ‘小學諺解卷二 ’였다. 권말서명은 대부분의 고서가 그러하듯 권두서명과 일치하는 ‘小學諺解卷之二’였다. 5침안정으로 된 이 책은 초간본이었고 사주쌍변이었다.
즉 중세 국어에 많았던 불경 언해(佛經諺解)는 근대 국어에 오면 거의 볼 수 없고, 대신 경서 언해(經書諺解)가 많아진다.또 17․18세기 자료에서 역학서(譯學書)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 근대 국어도 중세 국어와 마찬가지로 언해(諺解)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있다.
당시 한문으로 지은 것을 그의 아들인 柳僖(1773~1837)가 章節을 나누어 音義와 諺解를 붙여 1801년(순조 1)에 완성하였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 세자시강원 왕세자책봉이 이루어지면 왕세자교육 전담기관 經書와 史書의 시강과 도의를 바르게 계도하는 일을 관장 호위기관-세자익위사 宋나라 神宗(재위:1067~1085)이 태자로 책봉되었을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 그들은 경전의 주석과 언해(諺解)를 보고 그 글의 대강의 뜻을 해득한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벽촌의 훈장 가운데는 한자문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中庸諺解)」「논어언해(論 語諺解)」「맹자언해(孟子諺解)」의 사서(四書)와 「효경언해(孝經諺解)」등의 경서(經書) 를 찍어내는 데 이용한 활자다. ... 선조6년(1573) 계유의 보주 을해자, 동왕 13년(1580) 경진의 재주 갑인자 이외에 또 들어야 할 것은 국역본 「소학 언해(小學諺解)」를 비롯한 「대학언해(大學諺解)」「중용언해
經書正音 한글字本>이라 일컫는다. ... 이 한글자를 만든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도 원년(1777)에 인출된 明義錄諺解 와 그 다음해에 인출된 續明義錄諺解 를 보면 한글字가 아울러 쓰이고 있다. ... 한편, 이 활자는 楞嚴經諺解 에 처음으로 쓰여진 점에서 로 부르기도 한다.
증거는 제시할 수 없으나 첫째로 1세기에 걸쳐 여러 방면의 많은 한글문헌이 간행되어 널리 읽혔을 것이고, 둘째 한자와 한문의 학습에서 《훈몽자회》범례의 한 항목에서 말한 이유로 經書諺解 ... 첫째로 조선 초기의 한글 문헌은 대부분이 諺解書인 사실을 주목할 것이다. 둘째로는 조선 초기, 특히 15세기 중엽의 한글문헌이 보이는 자료와 규범성이다.
그들은 경전의 주석과 언해(諺解)를 보고 그 글의 대강의 뜻을 해득한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벽촌의 훈장 가운데는 한자문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 인원수는 3, 4명밖에 없는 소규모의 서당에서부터 몇 십명의 관동(冠童)들이 혼성되어 있는 대규모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이 있었고, 학력 정도도 《천자문》을 배우는 초학에서부터 경서(經書
원문은 없고, 언해문(諺解文)만으로 되어 있는데, 한자에는 바로 밑에 음을 달았다. ... (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3)대학(大學):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중요한 경서(經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