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以同異格之。恐非知言之義。君子之所肯允也。豈論學之謂哉。豈明辯之謂哉。後聖作而知我罪我。自無所逃。兄何虞焉。” ... 實惟在於吾之一心。豈有外於心而?求之理哉。若徒見可耕可馳之在牛在馬。就而求之則實亦茫蕩無歸。正涉逐物之病。某恐聖賢所爲性理之學。 ... 일찍이 20세 때 별시 (別試)ㆍ초시(初試)에 응하여 합격한 뒤 24세 때 동생(정제태 : 鄭齊泰)와의 공동 응거(應 擧)의 불미스러움을 이유로 재차의 초시 합격에서 중단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송시열은 이러한 격동기의 한복판에서 역사의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맞아 당대 지성인의 역사적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⑥ 이유태李惟泰(1607~1684) 17세기 ... 율곡의 생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1536년(중종 31년) 12월 26일에 강원도 강릉 북평촌 오죽헌烏竹軒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여성(汝省)은 종질(從姪) 진사 이재(李材)와 함께 몇 개월 동안 그 일을 감독하고 장인에게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 마침 종제(宗弟) 이경증(李景曾) 여성(汝省)을 만나 청주(淸州)에 출목(出牧)하게 되자 비로소 개판(開板)을 꾀하였다. ... 題冶隱集後 홍세태(洪世泰) 余嘗過松都登滿月臺。顧瞻其城郭山川。慨然有懷當時英雄豪傑之士。思與之遊而不可得。輒沽酒自酌。歌鄭圃隱死復死之歌。泣數行下。歌竟上馬而去。今年秋偶得冶隱集讀之。時余病臥。
등 20명, 이등으로 급제한 이래태(李來泰)등 30명에게 각각 편수(編修)?검토(檢討) 등의 관직을 제수하여 공동으로 『명사』를 편찬하도록 했다. ... 현재『사부창간(四部叢刊)』삼편속에는 이미 사계좌 『죄유록(罪惟錄)』60책이 들어 있다. 이 역시 본기?지?열전을 갖춘 한 부의 완전한 기전체이다. ... 『명사』는 건륭 4년(1739)에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하였으며 이미 간행한 정사와 합하여 중국의 정사는 24사가 되었다. Ⅱ『명사』 편찬의 세 시기 이진화(李晉華)의 『명사찬수고
정구(鄭逑,1543~1620), 김장생(金長生,1548~1631), 김집(金集,1574~1656), 정경세(鄭經世,1607~1684), 송준길(宋浚吉,1606~1672), 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유계(兪棨,1607~1684), 박세채(朴世采,1631~1695), 이재(李栽,1680~1746) 등인데, 당시의 예학은 두 계열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광개토대왕비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 여기에는 조작의 혐의가 있으며, 최근의 武田幸男과 盧泰敦 교수 등은 이 글자를 미상으로 처리하였다. ... 이 견해는 재일 사학자인 李進熙가 주장하였으며, 이는 식민사관의 청산과 민족사학의 계승발전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국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나아가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발적
이는 李如松이 지휘하는 명군이 少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력에 비해 절대다수였고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평양성내의 일본군을 완전히 ... 패전으로는 벽제전과 丁應泰의 무고사건{) 1598년 울산전투 직후 명의 병부주사 정응태가 당시 조선에 주둔해있던 명군의 경리양호를 탄핵하고 양호와 조선이 일본과 공 급격하게 늘어나게 ... 심유경 또한 당시 동남 연해지역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들에게 이른바 沈惟敬票帖 이라는 통행증서를 발급해준 뒤 조선에 대해 표첩을 소지한 일본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후반 당쟁(黨爭)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李泰鎭?李佑成의 논문이 제기되었다. ... 李建命?趙泰采의 소위 老論四大臣은 다시 罪案에 들게되고, 壬寅獄은 逆獄으로 규정되어 金龍澤?李天紀등의 諸人은 다시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 그리하여 일시에 老論三司 및 入侍諸臣등 모두 100여명이 파직되고 李光佐, 趙泰億을 領?左相으로, 李台佐, 尹淳, 李潗, 徐命均, 吳命恒을 판서로하는 소론정권이 성립하였다.
그의 중앙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 ≪참고 문헌≫ 國文要約, 明王朝成立硏究, 史學科 全淳東, 指導敎授 方用弼 중국 통사 徐連澾, 吳浩坤, 趙克堯 지음, 청년사 中國史 序說, 李春埴, 敎保文庫 http://www.chinainkorea.co.kr ... :江蘇省 泰縣)의 염전인 백구장(白駒場)에 적을 둔 소금 중개인이었다. 1353년 염장(鹽場) 관리와 염정(鹽丁) 사이의 분쟁이 일어난 것을 틈타 염정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