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의 학문을 대중화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그가 서술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더불어 호흡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3 (1) 홍이섭(洪以燮) 홍은 민족학교 배재에서 호암의 ... 우리나라 近代 歷史學의 發達 1930, 40년대의 民族史學 金容燮 1 20세기의 10년대와 20년대에 걸쳐서 우리나라의 역사학은 그 역사서술 면에 있어서나 그 역사의식면에 있어서 근대
彈石來洪按?無; 돌을 튀기듯 오면 홍맥이고 누르면 없다. 脈來堅實迫指,切切如彈中人,曰彈石。腎?。 ... 要當留心調燮,毋使更變驚人。 燮(불꽃, 익히다, 삶다 섭; 火-총17획; xie?) 요점은 응당 심을 머물러 고르게 익혀야 하니, 고쳐 변경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 兼胎? ... 猝以乖氣混擾,自然上下相奪,維時脈浮大有力,足勝病勢。
그의 동료 황신(黃愼)은 이미 옛 작품에 풍자적으로 왜곡한 것이 있었던 진홍수(陣洪綏) 진홍수(陣洪綏, 1599~1652). ... 그의 사상은 모순에 존재하며 “울타리 속의 기인[寄人籬下]”으로 재주가 있으나 불운하여 “평민으로 세상에 맞섰다[以布衣雄世].” ... 정섭(鄭燮, 1693~1765) 정섭의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이며 강소성 흥화(興化)인이다.
호암의 역사학은 실로 대중에게 민족문화를 바르게 이해시키고 민족정신을 암암리에 고취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가 되었다. 4) 홍이섭(洪以燮) - 6·25이후에 우리 역사학의 재건을 ... 이와 같은 연구에서 그는 일차사료를 분석 검토하여 피화자와 구화자의 사회적 지위와 그 학풍을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문헌 비판적인 실증적 역사학이었다. 6) 류홍렬(柳洪烈
조명성이 죽을 때에 서화가 수천점이 남았지만 洪州에 옮겨 놓았지만 金軍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거의 다 소실되고 말았다.) ... 송나라 때 호원임(胡元任)이 지은《苕溪漁隱叢話》와 이심전(李心傳)이 지은《建炎以來繫年要錄》에 따르면 ,50세 무렵 張汝舟 라는 사람에게 재가를 했는데, 서로 반목하여 관가에 송사까지 ... 그러나 청나라 때의 대학자 유정섭(兪正燮)과 이자명(李慈銘)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책을 인용하여 이청조의 재가설을 단호히 부정하고, 이는 당시 사람들이 그녀를 모함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洪以燮, 『朝鮮科學史』,三省堂, 1944, 433쪽. ... 에 대한 茶山 丁若鏞(1762-1836)의 입장이나 견해를 처음으로 문제 삼은 학자는 洪以燮(1914-1974)으로 생각된다. ... 그의 技術論'은 産業技術論'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 洪以燮, 『丁若鏞의 政治經濟 思想 硏究』(韓國硏究叢書 第三輯 -歷史-), 韓國硏究圖書館, 1959, 56쪽, 註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