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느와르 감독론
- 최초 등록일
- 2009.04.09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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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르느와르에 대한 감독론.
형식적 분석과 스타일연구
대학원수준의 내용
목차
<르느와르의 삶>
<무성영화시절의 장르느와르>
<유성영화시절의 장르느와르>
<미국에서부터 프랑스까지>
<희극과 비극의 혼합, 양면적인 리얼리즘>
<카메라의 화려한 움직임 - 30년대 영화와 ‘게임의 규칙’을 중심으로 >
<사운드의 활용>
< 딥포커스 촬영 >
<달라지는 후반기의 스타일>
본문내용
<르느와르의 삶>
르느와르 감독은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느와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해 부상을 입고 제대하였다. 그 후에 도예 작업을 하다가 그 당시 보았던 채플린과 에릭 폰 스트로하임의 영화들은 그가 감독이 되게 하는 결정적 역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23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영화사를 설립하여 영화제작을 시작하였다.
<무성영화시절의 장르느와르>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각본을 쓰고 아내인 카트린느 에슬링을 여주인공으로 알베르 듀도네가 연출한 <카트린느>를 제작하였다.)
1924년 첫 번째 장편영화 <물의 처녀>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에는 이후 자주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숭배, 계급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 기쁨과 슬픔의 교차 등과 같은 주제가 보인다.)
그 이후에 에밀 졸라의 소설을 각색한 <나나>와 <찰스톤>, <성냥팔이 소녀>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무성 시절 초창기 영화에서 뒷날 <게임의 규칙>에서 성취될 희극과 비극, 서정적인 분위기와 암울한 분위기의 조화를 볼 수가 있다.
계속 적인 흥행의 실패로 상업적인 영화 <마르키타>, <꾀병을 부려라>, <빈민촌> 같은 철저한 상업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유성영화시절의 장르느와르>
유성 영화가 도입된 1930년 초반에 르느와르는 사운드와 함께 영화적 기술을 익히고 구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첫 사운드 영화 <아기에게 약 먹이기>로 흥행에 성공한 뒤 , 그리고 사회성 짙은 희비극 <암캐>를 제작했다. (이 암케는 실제 현장에서 촬영되고 녹음작업을 한 청각적 리얼리즘이 탁월한 영화였다.) 1932년에 <익사에게 구조된 부뒤>, <교차로의 밤>, <쇼타르 상회>, <보봐리 부인>(로케이션 촬영과 비전문 배우 기용을 이미 부분적으로 선보였다는 점) 을 계속적으로 제작한다.
참고 자료
‘장 르느와르’ - 앙드레 바쟁 지음. 프랑소와 트뤼포 엮음 / 한나래
‘세계영화작가론1, 가치의 전복자들’ 전양준 엮음/ 이론과 실천
‘프랑스 영화의 이해’ 김호영 / 연극과 인간
‘장르느와르: <위대한 환상>,<게임의 규칙> 중심으로 / 신강호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