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는 草.漢전쟁
- 최초 등록일
- 2009.03.25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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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필자가 왜 “서초패왕”이라는 영화를 선택 했는가 이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먼저 草. 漢전쟁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는 “장기놀이”로 이어질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쟁을 이야기 전개의 중심에 둔 ‘서초패왕’ 이라는 영화는 단순 흥미위주의 역사 무협영화가 아닌 중국 역사상 가장 치혈한 전쟁이야기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역사 문헌(대표적인 책으로는 史記)잘 알려져 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실을 최대한 반영한 영화로써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역사적인 모습들을 주인공인 항우(서초패왕)와 유방의 관계를 통에 우리에게 사실적인 면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고, 때문에 이 영화가 필자에게는 中國古代史 진나라 멸망원인과 漢나라가 세워지게 된 그 배경을 이해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 생각 한다.
숙명의 라이벌 유방과 항우
草,漢간의 전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내었던 정치, 군사, 문화적인 충돌이었다. 항우는 진시황 사후 진나라가 멸망하자 의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지배적인 세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으며 한편 유방은 소시민 출신으로 한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가 실패한 후, 유방과 항우는 진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는 농민들을 계속하여 지도해 왔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적은 수로 거록(지금의 하북 평양 서남쪽)에서 진나라 군대의 주력 부대를 크게 이겼다. 그때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곧바로 압박해 들어갔다. 진나라의 통치자는 유방에게 투항하였고, 결국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이라 칭하면서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206년부터 항우와 유방은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4년에 가까운 전쟁을 벌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초한전쟁`이라고 칭한다. 전쟁 초기에는 항우의 실력이 훨씬 뛰어났다. 항우는 4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음에 반해, 유방은 고작 10만의 군사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민심에 신경을 썼고, 함양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모두 없애고 백성들에게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히거나 물건을 훔친 자는 모두 그 죄를 묻는다."는 `약법삼장`을 공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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