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 최초 등록일
- 2009.02.15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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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등소평의 생애, 정책, 업적, 리더십에 관한 조사 요약입니다.
목차
Ⅰ. 등소평의 생애
Ⅱ. 등소평의 정책과 공산주의 방식
Ⅲ. 등소평의 개혁 개방의 가속화
Ⅳ. 등소평의 리더십의 한계 - 6․4 천안문 사태(1984-1989)
Ⅴ. 등소평의 업적과 공훈
본문내용
Ⅰ. 등소평의 생애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등소평은 1902년 사천성에서 출생했다. 엘리트 계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신학문 교육을 위해 등소평을 프랑스에 일찍 유학시켰고 그는 그곳에서 공산주의자 청년동맹에 가입, 공산당원으로서의 일생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대학생활을 한 등소평은 중국에 귀국한 뒤 모택동이 조직했던 홍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장정 길에 모택동과 동행하였다. 1945년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으며 49년엔 제2야전군 정치위원, 52년엔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국가평의회 부수상을 지냈으며 54년 중공당 중앙위원을 거쳐 65년 당 총서기에
올랐다. 그러나 등소평의 원만한 당 생활은 중국 역사의 영원한 오점인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좌절당하고 만다. 평소 ‘자본론의 효용’을 주장하던 그를 유소기와 더불어 자본주의자로 낙인찍어 실각시킨 것이다. 등소평은 정치가로서의 쓰디쓴 첫 고배를 들이켜야 했다.
1973년, 은둔생활을 하던 등소평에게 다시 재기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당중앙 정치국위원이 되어 정치일선에 복귀했다.
Ⅱ. 등소평의 정책과 공산주의 방식
1. 등소평의 정책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의 진정한 가치는 비 혁명적 정책으로 사회전반에 걸쳐 근본적 변화를 파급시켰으며, 그러한 변화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와 맞물리면서 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상승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점을 보여주는 일화로는 당시 등소평은 부수상 겸 당총서기 직책에 있었다. 이 때 하북성에서 "1묘에서 벼 1만근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가 올라왔다. 즉 100평방미터 넓이의 논에서 벼 6000㎏을 생산했다는 황당무계한 보고였다. 당시 세계최고기록은 1묘에 1500㎏이었다. 당시 식량난에 허덕이던 중국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등소평은 현지로 내려가 확인을 하였다. 논은 분명히 큰 이삭을 달고, 누렇게 잘 익은 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발을 옮겨 놓을 틈조차 없이...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은 그렇게 빽빽이 자랐는데 어떻게 햇빛을 고루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나중에 비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이러했다. 하도 생산량을 높이라고 몰아치니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