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경복궁을 다녀온후.(사진첨부)
- 최초 등록일
- 2009.01.08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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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경복궁의 역사
․ 흥례문(興禮門)
․ 근정문(勤政門)
․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향원정(香遠亭)
본문내용
경복궁의 역사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1394년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와 사직 및 궁궐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1395년 9월 29일 총 755칸 규모의 경복궁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해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이후 1411년 태종은 경복궁에 금천을 파도록 명하고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건축하였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대왕 때였는데, 1426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명종 8년에는 실화로 경복궁이 전소되었는데, 이를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지었다.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때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불태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