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미술사-무위자연의 미의 맥락에서 본 분청사기에 대한 리포트
목차
서론
Ⅱ. 분청사기의 일반적 고찰
1. 분청사기의 생성배경
2. 분청사기의 미
Ⅲ. 분청사기의 회화적 요소
1. 자연성
2. 회화성
3. 추상성
4. 현대성
5. 대담성
결론
본문내용
Ⅰ.서론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이행(移行)되는 200여 년 간의 공백기 동안 이들의 매개자(媒介者)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생소할 만큼,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달리 명칭조차 일반적이지 않다. 분청사기란 용어는 분장회청사기(粉牆灰靑沙器)의 준말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이다.
분청사기는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 위에 담청색의 백자유(白磁釉)에 가까운 유약을 입힌다. 이렇게 분청사기는 백토분장 후에 문양을 시문하게 된다. 이때 분청사기에서는 여러 가지 문양시문 기법의 종류를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백토분장을 하는 것은 태토 표면을 고르면서 또 회게 만들어 문양을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계층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사랑받았던 최초의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 상에서 분청사기의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할 것이며, 고미술이 갖는 근본 목적이 유물에 내재한 가치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현재까지 연구된 학회지,논문,단행본 등을 중심으로 분청사기가 존재했던 시대적 상황과 분청사기의 미감적 특성들을 고찰하고, 분청사기가 한국미술사 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Ⅱ. 분청사기의 일반적 고찰
1. 분청사기의 생성배경
분청사기가 등장하는 고려말기는 불교가 국교(國敎)로 지정되어 사상사 전반을 지배한 시기였지만, 무신난(武臣亂, 1170년에 있었던 정중부의 난)에 이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인해 혼란의 일로(一路)를 겪고 있었다. 또 사회 전반을 이루던 농민계층은 지배층의 토지 지배의욕으로 인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노비의 지위로 급격히 추락하였고, 이러한 계급분화(階級分化)는 도적과 민란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정치적 측면에서 고려말기의 사회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 세력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대두하면서 강력한 집단 관료제가 추구되었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지주 전호제의 발달과 병행된 새 선진 농업기술의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비판과 함께 새로운 이념으로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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