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문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08.10.13
- 최종 저작일
- 2008.09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나열
목차
(1) 박문국의 한성순보 발간
(2)신문 발간의 목적
(3)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4)일간지 시대의 시작
본문내용
(1) 박문국의 한성순보 발간
우리나라 신문은 개화와 국민계몽이라는 뚜렷한 목적관 이상을 지니고 출발하였다.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가장 구체적이면서 상징적인 결실은 신문의 발간이었다. 외국의 문물을 국민들에게 소개하는 한편으로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2중적인 기능을 수행한 현대사의 중심 기관이었다.
(2)신문 발간의 목적
신문 발간의 목적은 국민의 문견을 넓혀 외국의 문물 제도를 배우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3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창간된 지 1년 남짓만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정변의 와중에 박문국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과 다원화한 언론계
1904년 2월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서 러시아세력을 제치고 정치적으로 독점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다.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고 이어서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협약’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독점적 실권을 잡아 언론통제의 요구를 계속하여 마침내는 민족 언론의 숨통을 틀어쥐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을사조약 후에는 일어 신문 「경성일보」와 영어 신문「서울 프레스」를 발간하여 국내에서의 정치적인 선전만이 아니라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유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04년의 러일전쟁 발발 이후의 언론 상황은 매우 다원적이고 복잡하게 되었다. 친일파 한국인들을 앞장세워 「국민신보」, 「대한신문」 등의 친일지도 발간하여 그들의 충실한 대변자 역할을 맡도록 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었던 때에 국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논조를 펴는 민족진영의 신문과 일본의 침략에 동조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친일지가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6)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국 언론을 검열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언론에 제도적인 통제를 가하여 정간 처분을 비롯해서 압수·발매금지 등이 빈번했으며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