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양병설의 진위
- 최초 등록일
- 2008.07.22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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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십만양병설의 진위 문제에 대해 열심히 썼습니다
목차
서론
역사서 안의 십만양병설
십만양병설의 진위 문제에 대한 주장
결론 및 나의 의견
본문내용
서론
아홉 번 과거를 봐서 아홉 번 장원급제를 해 구도장원공이라는 호칭을 얻은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대학자이다. 아울러 율곡은 주기철학의 이론을 정립하는 등, 학문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가히 앞 일을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을 가진 현인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을 임금에게 주청했다는 일은 후세의 우리들에게 널리 사실로 통용되고 있다. 이 십만양병설은 교과서에 실려있을 뿐 아니라 국가경쟁력을 논하는 대통령의 발언, 국가 안보를 논하는 포럼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용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위기와 가깝게 관련되어 있는 이 십만양병설은 우리들에게 “그 당시에 이 주장이 받아들여 졌다면” 이라는 아쉬움과 “그래도 이렇게 선견지명을 가진 위인이 있었구나” 하는 자긍심을 준다.
하지만 이 십만양병설은 율곡을 따르던 서인 쪽 제자들이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주장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중요한 우리 역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국민들이 ‘널리 알려져 있고 믿고 싶어하는’ 역사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에 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서 안의 십만양병설
율곡이 십만의 양병을 건의했다는 것은 율곡 연보 계미년(선조 16년) 4월조와 사계 김장생이 지은 율곡의 「행장」, 월사 이정구가 찬술한 「율곡諡狀(시장)」, 백사 이항복이 찬술한 「율곡신도비명」 및 『선조수정실록』임오년(선조 15년) 9월조에 기록되어 있음으로써 후일 정설로 내려오게 된다.
중략..
이 이후의 기록인 『인조실록』 인조 2년 10월의 기록과 『영조실록』 영조 41년 10월 29일의 기록을 보면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인용되어있다. 이를 통해 율곡이 임란전에 십만의 양병을 주장했다는 것은 후일에도 통용되던 사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서포 김만중과 성호 이익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김만중은 유성룡이 임란 이후에 율곡의 건의를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더라도 국력이 약했던 당시의 우리나라에 적합한 계책은 못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소고` 장숙필,율곡학회,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