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설명
- 최초 등록일
- 2008.07.17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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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설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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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를 서술하여 모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2. 한·일 고대 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羅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군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祿)」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비고(高句麗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인 이진희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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