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에 대한 소개와 그의 문학작품 세계
- 최초 등록일
- 2008.06.06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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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문학의 정서와 미학] 레포트
다산 정약용에 대한 소개와 그의 문학작품 세계
목차
1.다산 정약용의 생애
2.다산 정약용의 작품세계
3.마치며
본문내용
◎ 다산 정약용의 생애
다산 정약용이라 하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실학자, 정치가, 시인, 그리고 학자였다.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그의 가톨릭 세례명이다. 그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 갓 유입되기 시작한 가톨릭의 교리에 매혹되서 세례까지 받았을 정도로 믿음이 강한 신자였다.
다산의 생애는 대체로 수학기(修學期:1789년, 28세까지), 사환기(仕宦期:1800년, 39세까지), 유배기(流配期:1818년, 57세까지), 해배 이후(解配以後:1836년, 75세까지)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수학기(修學期)
다산은 1762년(영조38)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명관(名官)이며 학자였고,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다산은 자질이 영특하여 7세 때 오언시(五言詩)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시 중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구절이 있다.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 」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6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고 평생 성호선생을 사숙(私淑)하게 되었다.
22세(정조7) 때 증광 감시(增廣監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이것이 정조(正祖)와 다산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후 5, 6년 동안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는 한편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인 반제(泮製)에 여러 번 뽑혀서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2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다.
참고 자료
1.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송재소, 한길사
2. <다산시문집 해제(解題)>, 민족문화 추진회
3. 민족문화 추진회 (http://www.minchu.or.kr)
4.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