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위기
- 최초 등록일
- 2008.05.04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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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석유위기
목차
1. 석유위기의 역사적 관점
2. 석유 위기와 경제의 경제적 관점
3.국내 정세
4. 석유위기 발생 원인이 되고 있는 강대국간의 갈등
5. 앞으로의 전망
본문내용
석유 위기의 역사적 관점
①1차 석유 위기
제 1차 석유 위기는 1973년 10월 6일에 발발한 제 4차 중동 전쟁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아랍 산유국들은 이 전쟁을 OPEC의 위력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했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이용하여 석유 생산을 줄이는 한편 이스라엘과 협력 관계에 있던 미국 등에 대해서는 석유 금수 조치를 시행했다.
10월 16일에 쿠웨이트에서 소집된 OPEC은 원유의 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할 것을 발표하고 10월 이후 산유량을 매달 5%씩 줄여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정책은 이스라엘 군이 1967년 [6일 전쟁]당시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 4차 중동 전쟁은 1973년 11월 12일 개전 36일만에 휴전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나 석유 전쟁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울러 사우디아라비아는 친 이스라엘 정책을 견지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전면적으로 석유 금수 조치를 한다고 석유 회사에 지시했다. 특히 친미 노선을 걸어왔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향은 아랍 산유국의 단결을 극적으로 과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 직전에 ARAMCO의 회원사인 엑슨, 모빌, 소칼, 텍사코의 4개 대표는 닉슨 대통령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계속적인 지원은 온건파 아랍 국가들과 우리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유럽 각국은 미국의 이런 허점을 이용하여 중동에서 석유 공급원을 확대하려고 시도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사건이었다. 이 4대 회사중 액슨과 소칼은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록펠러가 창립한 회사였다. 석유 위기는 이들 회사까지도 반유태 정책을 펴도록 압력을 넣었다. 셸도 유태계 상인인 마르쿠스 사뮤엘이 창립한 회사였지만 반이스라엘 동맹의 동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은 영국에 속하고 반은 네덜란드에 속하는 셸은 영국에 석유 공급을 할 수 없게 되자 심한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의 에너지 장관인 캐링턴 경은 전직이 셸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에 석유 공급을 이전처럼 계속해 달라고 셸의 게리 와그너에게 간청했다. 셸의 와그너는 [이것은 국제 석유 회사의 의무이다. 범세계적인 규모에서의 공약인 것이다.] 석유 가격은 두달새 4배나 올랐다. 어떤 경제학자는 이제는 경제학이 정치의 시녀가 됐다고 한탄했다. 두달 사이에 4배나 폭등하는 석유 가격을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석유 공시가의 결정권은 OPEC에 넘어갔고 협상이란 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석유 가격을 결정하는 주체가 석유 회사로부터 산유국 정부로 바뀌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원유가의 급등으로 세계 정세는 혼란에 빠지고 대량의 달러화가 산유국으로 유입되는 한편 소비국들은 무역 적자와 경제 불황에 빠졌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석유 위기이다.
참고 자료
http://www.oil.or.kr/pdf/yearbook2002/1_1.pdf
http://www.wooribizclub.com/file_save/20109/(20060619)BOOK.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