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 최초 등록일
- 2008.02.29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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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에 대하여 여러 사료적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2.1 당시 시대적 상황
2.2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비교
3. 나오며
본문내용
2.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2.1 당시 시대적 상황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항량의 손에 길러졌는데 소년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숙부 항량과 함께 강동에서 거병, 양치기를 하던 초의 왕족 심을 회왕으로 추대하면서 반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유방도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우와는 달리 이름 없는 농민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농사에 뜻을 잃은 그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는 유력 가문인 여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뒤에 권력을 독단했던 여후이다. 고향의 말단관직에 오른 유방은 죄수들을 인솔, 여산릉 축조에 동원되었는데 도망하는 이가 속출, 화를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는 아예 이들을 풀어주고 스스로 유격대장이 됨으로써 반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항우에 비하면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량의 진영에 합류했고 이들은 함께 진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초 회왕은 여러 장군을 독려하면서 말했다. "최초로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
항우는 북로, 유방은 남로를 택해 각기 출진했는데 항우는 장감이 이끄는 진의 주력군 20만을 거록의 전투에서 궤멸시켜 천하에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막상 함양에 먼저 당도한 자는 유방이었다. 유방은 진의 허수아비 3대 왕영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도 모든 재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으며, 군기를 엄정하게 하여 민폐가 없게 하고 단 3조의 법, 이른바 약법 3만장을 남긴 채 일체의 법을 폐지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