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상 정권
- 최초 등록일
- 2008.02.09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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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정치, 김영삼정권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목차
Ⅰ. 문민정부의 성립과 개혁 드라이브
1. 문민정부의 성립과 성격
- 1992년 대통령 선거와 문민정부의 출범
- 30년만의 문민정부, 그 의의와 한계
2. 문민정부의 개혁 드라이브
II. 문민정부의 위기와 날개 없는 추락
1. 문민정부의 위기와 개혁의 실종
2. 문민정부의 날개 없는 추락
Ⅲ. 종합적 평가
본문내용
Ⅰ. 문민정부의 성립과 개혁 드라이브
1. 문민정부의 성립과 성격
-1992년 대통령 선거와 문민정부의 출범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회동하여 3당 통합에 의한 신당 창당 및 자당 5인씩 15명으로 창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키로 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3당 합당은 여소 야대 국회에서 정국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없었던 노태우 대통령의 입장과, 87년 대선 패배 후 제 13대 총선에서 제 2야당으로 전략한 김영삼의 입지, 군소 정당의 형편을 면치 못 하게 된 김종필의 긍지가 이 같은 창당으로 이어진 것인데, 이 3당 합당에 의해 김영삼이 여권의 대선 후보로 나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3당 합당으로 탄생된 민자당은 김영삼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대권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야합정치, 밀실거래라는 대의적인 명분 부족으로 인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게 된다.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군인 출신이 배제된 가운데 민간인 정치지도자간의 대결로 치러졌다. 이것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30년만의 일이었다.
대선은 민자당 후보 김영삼과, 신민당은 민주당과 합당을 하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야권 후보로 출마, 여기에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가 출마함으로써 15대 총선은 3파전 양상을 띠게 된다.
김영삼 후보는 기존 여당조직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재벌과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으며, 보수 언론으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등 가장 폭 넓은 조직기반과 풍부한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김영삼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신한국 창조’, ‘안정과 개혁’을 내걸었고, 김대중 후보는 ‘대화합의 정치’, ‘지역간, 빈부간, 도농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위화감과 적대감 해소’, 정주영 후보는 ‘민부의 시대’, ‘경제대국과 통일한국’ 이었다.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했으며, 최종집계 결과 김영삼 후보(민자당) 41.4%, 김대중 후보(민주당) 33.4%, 정주영 후보(국민당) 16.1%로 14대 대선은 집권세력의 완성과 야권의 패배, 민주 진영의 실패로 끝나게 된다.
참고 자료
-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2」들녘 1998
- 김운태 「한국 정치론」 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