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의 조선공산당
- 최초 등록일
- 2008.01.04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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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상해의 조선공산당의 레포트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 론
▣ 상해에서의 이동휘의 활동
▣ 최창식의 고려공산청년회의 구성
Ⅲ. 마치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는 해외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인 혁명가 중의 일부 지도자들은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활동에 과감하게 참여하고, 또한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활성시켜 나간다. 이 지도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이동휘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산주의 운동 지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상해로 갔으며 내노라하는 민족주의자들을 상해로 결집시킨 인물이다.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이동휘의 활약상을 통해 상해의 조선공산당이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어 나갔는지 알아보자.
Ⅱ. 본 론
▣ 상해에서의 이동휘의 활동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이동휘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역할은 명확하지 않은데, 코민테른과 중국을 비롯한 일본,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결합한 중요한 중개자로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동아시아 지역의 다른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책임을 이동휘가 맡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동휘는 일본, 중국, 대만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하여 상해에서 재정적인 원조를 했다. 1920년 봄, 보이딘스키가 상해에 오고부터는 이동휘는 보이딘스키와 함께 활동하였으나 보이딘스키는 슈미아츠키를 의장으로 하는 코민테른의 극동서기국의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따라서 슈미아츠키를 필두로 하는 이르츠크파와 이동휘가 이끄는 상해파 사이의 뒤얽힌 분파적 위화감은 보이딘스키와 이동휘와의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오스끼 사까에는 1920년 8월 한국인 사자로부터 상해로 초대받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는 이동휘와 여운형을 만났고 진독수의 집에서 개최된 6, 7인의 모임의 사회를 본 러시아인 보이딘스키를 만났다고 한다. 이 회합은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극동의 공산주의자의 최초의 시도였다고 생각된다.1921년 곤도 에이조가 상해에 왔을 때 보이딘스키는 떠나고 박진순이 이 회를 주재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