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8.15의 기억을 읽고)
- 최초 등록일
- 2007.11.13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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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8.15의 기억 을 읽고...
목차
미군과 친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었어요. - 동용하
이제부터 한국말로 방송한다. - 문제안
나는 지금도 아리랑을 자주 불러요. - 오오카와 키요시
10월 1일, 대구 시민들 분노하다 - 강창덕
일본 사람들을 때리면 영웅이 되었어요. -박문재
화장품은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 - 구용섭
본문내용
미군과 친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었어요. - 동용하
- 그 당시 통역관이라는 직업은 상당히 인기가 많았었다. 통역관은 돈을 많이 벌었다. 단순히 통역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통역을 하면서 미군들과 친해지고 미군들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다른 한인 업자들을 통해서 돈을 번다. 미군들과 친해지면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는 물자들을 미군들을 통해 들여와 팔아서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PX에서 물건을 사서 남대문이나 동대문 같은 곳에서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긴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통역관으로서 버는 것보다 물건을 팔아 번 돈이 더 많았다고 한다. 또한 통역관뿐만 아니라, 미군과 동거하는 여자들을 통해서 물건을 받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군들과 친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한다.
- 당시의 생활이 상상이 간다. 어떻게 해서든 미군들과 친해지려하고 미군들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미군들에 붙어있던 업자들이나, 통역관 그리고 동거하는 여자들... 지금 현실적으로는 비열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벌기가 힘들고, 먹고 살기 힘든 처지에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주위의 가족, 친척들 까지 취직 시킬 수 있게 하니 애국자로 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 글을 쓴 동용하 씨는 통역관 생활을 하면서 미군들을 통해 물건을 팔거나 중간에서 소개해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 역시 동용하 씨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나 역시 아직 어리니까 정정당당히 해서 돈을 버는 보수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후에,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업자들처럼 바뀔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동용하 씨처럼 일을 하고 싶다.
이제부터 한국말로 방송한다. - 문제안
- 1942년 일본은 과달카날에서 작전상 전진이라는 이유로 후퇴를 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패전의 길로 돌아섰음을 짐작하였다. 또 하나의 실화는 비행장 건설의 비교이다. 일본은 가비엥이라는 곳에 작은 전투기가 이륙할만한 비행장을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렸지만, 미국은 단 3일 만에 중폭격기가 뜰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었다.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일본인조차도, 일본군조차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문제안 씨는
참고 자료
8.15의 기억| 문제안 외 40명| 한길사| 2007.10.19/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