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호승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7.06.21
- 최종 저작일
- 2006.1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시인 정호승에 대한 연구입니다.
목차
▲ 호승의 생애
▲ 호승의 문학활동
▲ 호승의 시에 나타난 사회의식
▲ 호승의 문학
본문내용
.▲ 호승의 생애
시인 정호승의 본명은 정영택(鄭英澤1916.1.5~?)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들에게 많이 낯선데 이러한 생소함은 그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그동안 문학사에서 철저하게 소외 된데서 기인한다.
정호승은 1916년 1월 5일 충주시 교현동에서 태어났으며, 8세가 되던 1923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29년 14세때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하였다. 중앙고보 재학시 좌경서적 등을 읽다 유기정학, 무기정학을 네 차례 당하고는 끝내 퇴학당하고 말았다. 13세 때 부친을 사별하였으며 18세 되던 해인 1933년 최씨와 결혼하였으나 2년 뒤에 그만 부인이 생목숨을 끊는 참극을 겪게 된다.
1935년 서울로 이사하여 왕십리에서 생활하며 조선문학사를 운영하였다. 1936년 고향으로 내려온 정호승은 1938년 23세 때에 정정순(鄭丁順)과 다시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듬해 첫딸 태형(泰螢)을 낳았으나 1달만에 백일해로 죽고 만다. 이때의 심정은 시「상흔」에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1939년 시집『모밀꽃』을 출간하였고 1940년 차녀 태남(泰男)을 낳는다. 일제의 중국 침
략 이후 문인·지식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이 고조되던 1940년경부터 사찰 대상이 되어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부인이 시 원고와 서적 등을 불태웠다고 한다. 1942년 삼녀 태숙(泰淑) 1944년 장남 태준(泰駿)을 낳았다.
1946년 일제가 물러가고 난 이듬해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간 복역을 한 바 있고, 남북협상 때 김구선생과 함께 북으로 다녀온 후 또다시 청주 교도서 에서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1947년 출옥 이후 도피생활을 시작하는 동안 차남 태옥(泰玉)이 태어났고 가족들은 외가
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피신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