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광주 학생 항일 운동
- 최초 등록일
- 2007.04.17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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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학습자료입니다.
목차
첫 번째 자료
두 번째 자료 (사전자료)
세번째자료
네 번째 자료
다섯번째 자료
여섯 번째 자료
일곱 번째 자료
여덟 번째 자료
본문내용
첫 번째 자료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개> (근현대사교과서자료-금성출판사)
1929년 10월 30일 오후 광주를 떠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 중학교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 여자 고등 보통 학교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였다.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 등이 제지하였으나 일본 학생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조선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3일 오전 11시경 광주 중학교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 고등 보통 학교의 조선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일부 조선 학생들은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 어용 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 사건은 전 호남 일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지원하였다. 경찰은 광주 고등 보통 학교와 광주 농업 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맞서 광주의 신간회 지부, 청년 단체, 사회 단체 등은 하나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 장재성, 강석원 등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광주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에 힘썼다.
11월 7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도 지도, 장재성은 광주 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 및 노동 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남 각 공립 보통 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 자금 조달 등으로 업무를 분담하였다. 마침내 11월 12일 제2차 투쟁이 전개되었다. 등교한각 학교 학생들은 9시 30분을 기하여 일제히 전날까지 인쇄하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에 돌입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두 번째 자료 (사전자료)
광주학생운동의 개관
운동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 운동의 발단과 결과 및 전국의 학생운동에 끼친 영향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