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정치사상에 보이는 도학정신과 지치주의
- 최초 등록일
- 2006.12.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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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광조의 업적과 그 업적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을 연관지어서 쓴 글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조광조의 정치 사회적 등장배경
2.조광조의 도학정신과 지치주의
3.지치의 실현노력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조광조가 바라는 것 또한 이러한 것으로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중요시했다. 자신을 바로 세우고 난 다음에야 비로써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을 함에 있어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소학』을 중시 여겼던 것이다. 정암 조광조의 일생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482년 한양에서 태어나, 17세 때 무오사화로 인해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510년 성균관에 천거되고 홍문관․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조광조가 활동한 때의 조선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이 왕권을 잡은 시기였다. 박원종을 중심으로 중종반정을 일으킨 훈구대신들은 공신의 반열에 들고 모든 정권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서 왕좌에 오른 중종은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왕권의 회복을 꾀하게 되고 그 대안으로 사림들의 정계진출을 장려했다. 그는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1518년에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고, 1519년에 위훈삭제를 청하여 훈구파의 반발을 사 결국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어, 자신의 꿈인 왕도정치의 실현을 이루지 못한 채 귀향 후 사사 당하게 된다. 여기서는 비록 38세의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우리 역사상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깔려있는 그의 도학정신과 지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조광조의 정치․사회적 등장배경
조선의 성립과 동시에 추진해 왔던 문물제도의 정비는 성종조(成宗朝)에 이르러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웠으나 연산군(燕山君)의 실정으로 관료체제(官僚體制)의 균형이 파괴되었다. 정국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처하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그러나 반정공신의 지지를 기반으로 즉위한 중종은 그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이는 결국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왕권의 약화는 중종으로 하여금 훈구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의 신장을 꾀하려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 한 방법으로 중종은 사림들을 삼사의 중심으로 등용한 것이다. 그 결과 중종 초의 정책은 대부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훈구세력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서기원 지음. 『정암 조광조』. 학원출판공사. 1997
이상성 지음.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심산문화. 2003
최락도 지음. 『우리시대에 조광조가 있다면』. 푸른샘. 2002
이기백 지음. 『한국사 신론』. 일조각.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