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도입과 차자표기의 발달
- 최초 등록일
- 2006.12.19
- 최종 저작일
- 2005.09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자의 전래와 차자표기
목차
1. 한자의 전래
2, 차자표기
1) 서기체(誓記體)
2) 이두(吏讀)
3) 향찰(鄕札)
4) 구결(口訣)
본문내용
1. 한자의 전래
한자가 수용된 시기는 고조선 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초 이른 시기에 이미 한자를 사용했으며, 한문으로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을 편찬하였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자체에서 키웠다기 보다는 고구려 유민이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신라는 한문을 수용한 것이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는데, 3세기 경에는 지체가 낮아도 글을 쓰고 계산하는 능력이 있으면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 육두품의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삼국을 건국한 것은 군사적인 귀족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습을 교정시키며, 전승을 기록하고 글로 계산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자를 아는 사람을 발탁해서 그런 일을 맡기게 되었다. 이런 데에서 초기의 한문이 나타났는데 이는 실무 기술적인 면에서나 소용되는 글이었고, 이념적 표현이거나 문학적인 창작은 아니었다. 초기의 한문은 고대 문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현상을 나타내 준다. 고대 문학이 우리말 문학의 시대이고, 문화적인 자기 중심주의의 속성을 지녔다면, 중세 문학은 한문학을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으로 삼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 문화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 시대의 문학이며, 중국에서 다듬어진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 文語와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를 채택하면서 문화적 보편주의를 구현했다는 성격을 지닌다.
한문의 수용과 발전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말 문학에 의한 문화적 자기 중심주의가 기층 문화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불행이다. 하지만 문명권 전체의 공동 문어와 세계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지혜를 서로 나누고 고대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사회 변화에 상응하는 이념적 예술적 향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측면이다. 황제를 함께 인정하는 영역 안에서는 지배층에 속하는 문인이라면 누구나가 공동의 문어로 된 같은 격식의 시를 지을 수 있는 데에서 서로의 동질성이 확인되어 중세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환제의 나라에서조차 口語로 된 문학이 일어나 공동의 文語를 불신하게 되자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문을 가져와 사용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말과 어순이나 문법이 아주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런 까닭에 한문 문장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여러모로 시도되었고, 따라서 본래의 한문과 우리 말투의 한문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